‘창업주 글귀’ 되새기고, 후계자 전면에…회장님 시계가 빨라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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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9일 경기도 용인시 삼성전자 기흥캠퍼스에서 열린 반도체 연구개발(R&D) 단지 기공식에서 이재용 부회장(사진 가운데)과 주요 경영진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지난달 19일 경기도 용인시 삼성전자 기흥캠퍼스에서 열린 반도체 연구개발(R&D) 단지 기공식에서 이재용 부회장(사진 가운데)과 주요 경영진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반도체·컴퓨터 산업은 그 자체로서도 시장성이 클 뿐만 아니라 타 산업에 파급 효과가 지대하며 무공해, 생자원(省資源·생산의 근원이 되는 자원이나 소재·부품을 가리키는 용어), 기술 및 두뇌 집약,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서 우리 실정에 매우 적합하여 국제 경쟁력을 갖고 있다-.

지난달 19일 경기도 용인시 삼성전자 기흥캠퍼스 연구개발(R&D) 단지 기공식 행사장. 대형 발광다이오드(LED) 스크린에 한자와 한글이 섞인 문구가 게시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할아버지인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1983년 반도체 사업 진출을 알리는 ‘도쿄 선언’ 직후 임직원에게 강조한 얘기 중 일부로, 이날 39년 만에 처음 공개됐다.

이병철 ‘도쿄 선언’ 일부 첫 공개 

삼성전자가 이날 기공식에서 이런 이벤트를 마련한 것은 기흥캠퍼스가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곳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동시에, 이 부회장이 ‘뉴삼성’을 제시하는 새로운 도전에 앞서 창업주의 절박했던 심정과 기술 초격자 확보에 대한 의지를 되새기기 위한 뜻으로 풀이됐다.

물가상승과 고환율, 고금리등 복합 위기가 불거지면서 미래 불확실성이 커지고, 4차산업혁명과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대두로 경영 환경이 급변하는 가운데 기업들이 ‘초심’을 바탕으로 재도약을 다짐하고 있다. 한편으론 오너 3·4세 경영 승계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이 부회장은 지난 광복절 특별 복권 뒤 첫 대외 활동으로 반도체 R&D 단지 공사 현장을 찾았다. 미·중 기술 패권 다툼, 중국의 추격 속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은 기로에 서 있다. 이 부회장은 어느 때보다 중요한 기술 초격차 확보 의지를 이병철 창업주의 글귀로 전달한 셈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승계자로서 입지를 강화하는 목적으로도 보인다”며 “할아버지가 40년 전 초석을 다진 사업장에 반도체 연구소를 지어 앞으로 50년을 책임지겠다는 뜻 아니겠냐”고 말했다.

창업 정신은 위기나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할 때 소환된다. 이춘우 서울시립대 경영학과 교수(기업가정신학회장)는 “창업주의 철학과 가치 규범은 기업문화의 토대를 이룰 만큼 중요하다”며 “또 회장이 얘기하면 권위로 보일 수 있지만 전설처럼 여겨지는 창업주의 말은 신선한 느낌을 주면서 더 인상 깊게 전달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장학퀴즈는 고(故) 최종현 선대회장의 후원으로 1973년 2월 시작됐다. 사진 SK그룹=연합뉴스

장학퀴즈는 고(故) 최종현 선대회장의 후원으로 1973년 2월 시작됐다. 사진 SK그룹=연합뉴스

위기 속 창업 정신 되새기며 재도약 꾀해 

다른 대기업들도 선대회장과 ‘대화’를 늘리고 있다. 이들 기업은 선대회장의 정신을 새롭게 정의해 계승하고 있다. 이 교수는 “창업주 정신은 보편적 가치처럼 변하지 않는다”며 “다만 정신은 계승하되 구체적 실행 방식은 바꿔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SK그룹은 지난달 26일 고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 24주기를 맞아 50년간 추진해온 ESG 경영 사례를 소개했다. SK그룹 측은 “최 선대회장이 ‘기업 이익은 처음부터 사회의 것으로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신념으로 숲 조성과 인재 양성에 힘썼다”며 “최태원 회장이 선대회장 유지를 이어받아 탄소 감축과 친환경 비즈니스 모델, 이사회 중심 경영 등으로 ESG 가치를 강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한 번 경험하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기 힘든 가치 있는 고객경험에 집중하자”고 제안했다. LG전자는 최근 고객경험을 강조한 ‘업그레이드 가전’과 전에 없던 틔운(식물재배기), 홈브루(캡슐형 수제맥주제조기), 슈케어(신발관리기) 등 새로운 가전을 전면에 내세워 수요 위축에 대응하고 있다.

지난 6월 서울 마곡 LG사이언스파크에서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촉매 활용 탄소 저감 기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3. 28일 서울 마곡 LG사이언스파크에서 (주)LG 구광모 대표가 차세대 배터리 소재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 LG그룹

지난 6월 서울 마곡 LG사이언스파크에서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촉매 활용 탄소 저감 기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3. 28일 서울 마곡 LG사이언스파크에서 (주)LG 구광모 대표가 차세대 배터리 소재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 LG그룹

구 회장의 ‘고객 경영’은 고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제시한 ‘고객가치 경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구 명예회장은 1990년 새로운 경영 이념으로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를 선포했다. 현장에 갈 때마다 “고객의 입장에서 듣고 생각하라. 이것이 혁신이다”라고 강조했으며 사내 문서 결재란의 회장 결재 칸 위에 ‘고객 결재’ 칸을 만들고, 회의실마다 ‘고객의 자리’를 마련했다고 한다.

구 회장은 최근 서울 마곡 LG전자 고객가치 혁신조직(CX)을 방문해 “고객가치 혁신은 단순히 사업을 잘 해보자는 차원이 아닌 기업의 생존과 관련된 이슈”라고 또 한 번 강조했다.

정신 계승하되 형식은 시대 맞게 변형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역시 지난해 3월 서울 양재동 사옥 도서관에서 열린 임직원 타운홀 미팅(비공식 공개회의)에서 “(정주영 창업주가) 가장 중요하게 지킨 것이 신용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정몽구 명예회장이 강조한 품질도 곧 신용”이라며 “그 정신을 배우고 반드시 우리 것으로 만들어 해내야 한다”고 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생전 “신용은 곧 자본이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커가거나 대기업이 세계적 큰 기업으로 성장하는 열쇠는 바로 이 신용에 있다”는 신용론을 폈다.

지난해 3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타운홀 미팅에서 직원들과 대화하고 있다. 사진 현대차

지난해 3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타운홀 미팅에서 직원들과 대화하고 있다. 사진 현대차

세대교체로 경영 환경 변화에 선제 대응
한쪽에서는 세대교체 바람이 불고 있다. 경영 전면에 1980~90년대생 오너 3·4세들이 속속 나서며 경영권 승계 작업이 본격화하는 모습이다.

한화그룹은 지난달 29일 김승연 회장의 장남 김동관 한화솔루션 대표가 부회장으로 승진한다고 밝혔다. 2020년 9월 사장으로 승진한 지 2년 만이다. 김 부회장은 이번 인사로 한화솔루션에 더해 ㈜한화·한화에어로스페이스 등 주요 계열사의 전략부문 대표도 맡게 됐다.

한화 측은 이번 인사가 김 회장의 경영 구상을 구현하는 역할이라고 설명했지만, 재계는 김 부회장이 에너지·석유화학·방산 등 주요 사업을 책임지게 되면서 경영 승계가 속도를 낼 것으로 관측했다.

지난달 31일에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장남 신유열(일본명 시게미쓰 사토시) 롯데케미칼 일본지사 상무가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 화제가 됐다. 최근 광복절 특별 사면을 받은 신 회장은 신 상무와 함께 베트남 출장길에 올랐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신 회장 부자(父子)는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국가주석을 면담한 데 이어 롯데건설이 수주한 하노이 스타레이크 신도시 등을 방문했다. 재계는 신 회장의 사면 후 첫 해외 출장에 신 상무가 동행한 만큼 본격적 후계 수업이 시작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현대중공업그룹에서는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장남 정기선 HD현대·한국조선해양 사장이 지난 3월 지주사 대표로 선임됐으며, CJ그룹에서는 올 초 이재현 회장의 장남 이선호씨가 CJ제일제당 글로벌 비즈니스 담당 부장에서 식품전략기획1담당 경영리더(임원)로 승진했다.

“새 리더십 체계에서 신구 조화 필요”

홍대순 글로벌전략정책연구원장은 “산업계는 MZ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 세대)가 주 고객층이 되는 등 새로운 경영 환경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며 “세대교체는 과거 아날로그적 관점에서 벗어나 사회의 변화를 빠르게 포착하는 데 유리하다”고 말했다.

이어 “일각의 부정적 시각도 있지만 책임 경영과 빠른 의사 결정 등 장점도 많다”며 “새 리더십 체계에서 신구의 조화가 필요한 만큼 좋은 것은 계승하고, 본인의 색을 투영해 기업을 최적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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