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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법원, 정치한 것 아닌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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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논설위원

고정애 논설위원

‘Mr 비상대책위원장’ 김종인이 최근 국민의힘에 준 처방이다. “법원에서 비대위에 제동을 건 이상 비대위 체제가 존속되긴 쉽지 않다. 조속히 전당대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해 전당대회를 열고 당 체제를 정상화하는 것이 급선무다.”

정치를 법에 맡긴 국민의힘 한심 #법원도 '비상상황' 등 기이한 판단 #'정치사법화''사법정치화' 다 문제

 합리적이다. 하지만 서울남부지법 민사51부의 가처분 결정을 지키면서 따르기엔 지난한 항로(航路)다. 거칠게 정리하면 법원의 ‘지침’이 이래서다. ①비대위를 설치할 비상 상황이 아니니 ②최고위로 돌아가야 하고 ③결원된 최고위원은 전국위에서 뽑으면 되고 ④이준석이 당 대표로 복귀하기 전에 전당대회를 열어 새 대표를 선출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법원의 판단은 가처분 결정이더라도 따라야 한다. 하지만 판단에 동의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우선 법원이 비상 상황을 엄격히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여의도의 현실과 동떨어졌다.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식 1인 지배 정당 체제가 약화한, 즉 '정당 민주화'가 진행된 2000년대 중반 이후 비대위 체제는 비상 아닌, 범상한 체제였다. 임기를 채운 대표보다 못 채운 대표가 많고 그 사이엔 으레 비대위원장이 끼었다. 대충 꼽아봐도 국민의힘 계열에선 박근혜·인명진·김희옥·김병준·김종인, 더불어민주당 계열에선 임채정·정세균·유재건·박지원·박기춘·문희상·김종인·도종환 등이 있다. 법원이 “일부 최고위원들이 당 대표 및 최고위원회의 등 국민의힘 지도체제의 전환을 위해 (비상 상황을) 만들었다”고 했던데, 바른미래당 시절의 이준석을 떠올리면 잘 알겠지만, 정치엔 원래 ‘국왕 살해(regicide)’의 속성이 있다.

 법원이 비상 상황을 판단하며 당 대표의 당원권 6개월 정지를 고려하지 않은 것도 놀랍다. 한국 정치가 롤러코스터 같다지만 전무후무한 일이어서다. 이준석이 측근을 보내 성 접대 의혹 무마와 관련, 7억원 투자 각서를 써준 걸 윤리위에서 문제 삼았는데, 여느 정치인이라면 진즉에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법원이 “당 대표와 최고위원들 사이에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 비대위 설치가 당원의 총의를 반영한다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민주적 정당성의 크기에 비례하여 구성된 당 기구 사이의 민주적 내부 질서를 해할 수 있어 허용될 수 없다”란 주장도 대단히 독특하다. 당 기구의 인원을 기준으로 전당대회(1만 명 이하)〉전국위(1000명)〉상임전국위(50명) 순으로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하며 전대에서 뽑힌 당 대표나 최고위원직 박탈을 ‘하위’인 전국위에서 할 수 없다고 주장해서다. 허영 경희대 석좌교수는 “민주적 정당성의 크기를 따지는 그 자체가 법원의 권한을 넘어선 것”이라고 본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성일종 정책위의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스1]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성일종 정책위의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스1]

 설령 법원의 ‘민주적 정당성’ 주장이 맞다고 치자. 바로 논리적 충돌이 발생한다. 법원은 전국위에서 궐위된 최고위원을 뽑으면 된다는 투다. 현재 최고위원은 없는 상태다. 설령 전국위에서 최고위 해산 의결을 무효로 하는 의결을 하더라도 9명 중 당연직(원내대표·정책위의장) 2명과 당시 기준으로 사퇴하지 않은 청년최고위원만 있을 뿐이다. 전대에서 뽑힌 서열상 우위인 선출직 네 명은 공석이다. 이 모두를 전대가 아닌 전국위에서 채운다? 민주적 내부 질서를 해하는 것 아닌가.

 이번 아노미의 근본 원인은 정치 영역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법원으로 가져간(가져갈 수밖에 없게 한) ‘정치의 사법화’에 있다. 일차적 잘못은 이준석의 징계를 주도한 세력, 즉 일부 '윤핵관'에게 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무능했고, 반비례해서 오만했다. 그렇더라도 사법부가 정치의 영역까지 들어와 시시콜콜하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법의 정치화’도 문제다. 다양한 정치적 가능성의 싹은 다 잘라 버리고 일정 기간 “한 정당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말도 안 되는 행위”(허영 교수)를 해서다. 선을 넘었다.

 이젠 권성동 원내대표도 물러난다고 한다. 법원이 여전히 비상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할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