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형석의 100년 산책

강연 인생 70년, 그 안에서 건진 것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103세를 맞이하는 지난봄이었다. 강연을 끝내고 주최 측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한 분이 “제가 육군사관학교 생도일 때 선생님 강연을 들었습니다. 그때 ‘국가공무원과 군인은 계급직책제도여서 누구나 승진하려는 의욕을 갖고 경쟁하게 됩니다. 그러나 서둘지 말고 실력을 쌓으면서 힘들더라도 중책을 맡으세요. 그러면서 진급해 가는 사람이 큰일도 하고 성공하게 된다’고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제가 그 가르침대로 따랐습니다. 승진은 늦은 것 같았으나 끝까지 중책을 맡아왔습니다. 국방부 장관으로 공직을 떠났습니다”는 얘기를 했다.

나는 오랫동안 글을 책으로 남기는 것은 열매가 있지만 강연은 행사가 끝나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지금과 같은 사람들의 얘기를 자주 듣게 되면서 강연은 강연대로 사회교육의 의미와 보람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곤 한다.

올해 103세, 강연 요청 끊이지 않아
젊은이에 도움 된다면 사양 못 해

선친이 남겨준 한마디 종종 꺼내
“국가·민족 걱정하면 지도자 된다”

강연비 모아 대학생 장학금 기탁
신체 노화해도 정신은 성장 가능

윤동주와 황순원, 그리고 홍창의

김형석 교수는 100세가 넘은 나이에도 일반 강연에 자주 나간다. 2019년 말 ‘100세 인생,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를 주제로 토크 콘서트를 하는 모습이다. [중앙포토]

김형석 교수는 100세가 넘은 나이에도 일반 강연에 자주 나간다. 2019년 말 ‘100세 인생,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를 주제로 토크 콘서트를 하는 모습이다. [중앙포토]

한 달쯤 후였다. 호암재단에서 중·고등학생을 위한 전국 규모의 온라인 청소년 강연회에 초청을 받았다. 함께 강연하는 연사들은 학생들의 관심과 흠모의 대상이 되는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다. 30대에서 60까지의 성공한 유명 인사들이다. 100세가 넘은 나 같은 늙은이가 동참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젊은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사양할 수가 없었다.

세 가지 얘기를 했다. 내가 중학생 때, 시인 윤동주, 소설가 황순원, 우리나라 소아과의학을 개척 선도한 홍창의 교수 등을 소개해 주면서 20세가 되기 전에 한평생 내가 하고 싶고 해야 할 나의 길을 찾아가는 사람이 되어 달라고 당부했다. 학교 성적이 인생의 평가도 아니고 모범적이고 장래성이 있는 학생의 기준도 아니다, 16~7세까지는 기억력이 좋은 학생이 성적이 앞서지만 더 중요한 것은 폭넓은 독서와 인간관계를 위한 이해력이 뒤따라야 한다, 학자가 된다든지 크게 성공하는 사람은 늦게까지 사고력에서 앞서야 한다 등을 이야기했다.

20세기의 가장 훌륭한 영재를 꼽으라면 영국의 처칠 수상일 것이다. 그는 40이 넘으면서 영재다운 평가를 받았다. 대학입시에는 낙방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은 누구나 천재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의 대학 은사는 “내가 너를 가르칠 때는 평범한 학생으로 보았다. 그런데 상대성원리를 보았을 때, 네가 역사에 남는 과학자가 되었다”고 칭찬해 주었다. 대학생 때는 늦둥이 범생이로 보았던 것이다. 수능 성적이 좋았던 학생이 대학에 와서는 뒤지고 대학원에 가면 수능 성적이 낮았던 학생이 앞서는 것은 기억력이 좋았던 학생보다 사고력이 더 중요하다는 증거다. 정치가나 실업가로 성공한 사람들은 학교 성적이 우수하지는 않았다.

그다음은 내 부친이 나에게 들려준 교훈을 소개했다. “항상 나와 가정을 위해 사는 사람은 가정만큼 성장한다. 유능한 친구들과 좋은 직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그 직장의 주인이 된다. 그러나 민족과 국가를 걱정하면서 사는 사람은 국가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 평범한 얘기의 반응은 좋았다. 그런 재미로 지금 나이까지 강연하는지 모르겠다.

미국과 캐나다의 교포를 위한 강연회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LA 동양선교교회 임동선 목사는 군목생활을 했고 숭실대 출신이다. 여러 해에 걸쳐 강연과 설교 요청을 받았다. 기독교 정신을 교회와 교리로 제한하지 말고 인생관과 삶의 가치관으로서의 진리로 역사와 사회를 위한 희망의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한 번은 교회와 관계도 없는 사람이 익명으로 막대한 헌금을 하면서 “김 교수께 드려 달라”는 쪽지를 남겼다. 다음 해에도 같은 사람이 직접 목사님에게 “김 교수에게 맡겨 달라”면서 큰돈을 주고 자신을 밝히지 않고 사라지기도 했다. 교회가 그분이 준 헌금만큼 추가해서 나에게 주었다. 그 덕분으로 나는 두 차례에 교회 명의로 연세대에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을 기탁하는 기쁨을 나누었다.

미국과 캐나다의 큰 도시의 대부분은 강연을 위해 방문한 셈이다. 텍사스 댈러스에 갔을 때였다. 미국인 부부가 청중 속에 앉아 있었다. 비교적 긴 강연을 끝내고 티타임을 가졌을 때, 그 부인이 “당신이 1920년 평북 운산 광산촌에서 태어났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이 사람이 내 아들인데 같은 해에 북진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내가 “내 모친이 내가 너무 병약한 체질이어서 미국 의사 파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했더니, “그러면 나도 당신 어머니를 만났을 것이라면서 살아 계시냐”고 물었다. 서울에 계신다는 말을 듣고 서로 본 적이 있었을 것 같다면서 반겼다.

세계는 넓어도 우리는 가까운 이웃

파워 의사는 세상을 떠났고, 부인은 치매로 활동을 못 한다는 설명까지 추가해 주었다. 내가 그 남편으로 착각했던 친구가 북진금광 동기생이었다. 나는 5살에, 자기는 교육을 받기 위해 7살에 미국에 왔다는 얘기를 나누면서 웃었다. 파워 의사, 내 은사인 마우리(Eli M Mowry) 선교사, 이 늙은 미국 친구 모두가 오하이오 출신이다. 지금은 내 막내딸이 교수로, 사위와 외손자는 의사로 오하이오주에 살면서 봉사하고 있다. 세계는 넓은 것 같아도 모두 가까운 이웃이다.

9월에는 우리나라 아시아의 뇌 연구 과학자들을 위한 세미나의 주제 강연을 맡았다. 내 나이가 될 때까지 정신적 활동을 하는 현상과 대뇌 기능의 관계 얘기를 원하는 강연회다. 관찰과 연구재료 대상이 되는가 싶어 수락했다. 신체의 변화, 노쇠현상은 누구나 체험하지만 정신적 기능과 성장 발전은 모두 다르다. 철학자 중에는 피아노가 고장 나면 음악은 사라지지만 연주가는 따로 존재한다는 이원론을 지지하기도 한다. 우리의 의식은 대뇌 기능과 더불어 존재하나 뇌 자체의 생리적 기능으로 제한되지는 않는 것 같다. 내가 갖고 있는 철학적 사고보다 더 확실한 인간 기능을 위한 연구재료가 되는 것 같아 어색하기도 하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