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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가분이 고발한다

"싹 갈아엎자" 정의당 초유 사태…국힘·민주, 당신들의 미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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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 연구자이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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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당 비례대표 의원 사퇴를 요구하는 당원들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아래는 정의당 비례대표 의원 5인. 그래픽=김경진 기자

정의당 비례대표 의원 사퇴를 요구하는 당원들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아래는 정의당 비례대표 의원 5인. 그래픽=김경진 기자

국민의힘 내홍에 비하면 존재감이 턱없이 약하지만, 현재 정의당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한국 정당 정치 전체에 닥칠 ‘예언’과 같다고 본다. 지금 정의당은 ‘비례대표 국회의원 사퇴 권고 당원총투표’를 진행하고 있다. 정의당에는 류호정·장혜영·강은미·배진교·이은주 비례 의원이 있는데, 지난 대선(3월)과 지방선거(6월)에서 정의당이 폭망해 몰락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하라는 요구가 이번 당원총투표의 핵심 내용이다. 구속력은 없지만 상징성은 적지 않다.

이 초유의 사태는 당원들의 연서명으로 시작됐다. 정의당 당규에 의하면 당원총투표는 당권자(당원) 5%의 서명이 있으면 발의할 수 있다. 이번엔 1002명이 서명했다. 지역구로 당선된 심상정 의원을 포함해도 여섯 석이 전부인 정의당에서 비례대표 전원 사퇴 권고라는 건 사실상 심 의원에게도 정계 은퇴를 하라는 요구다. 이쯤 되면 ‘아래로부터의 반란’이다.

우선 쟁점을 살펴보자. 총사퇴 찬성 쪽은 정의당이 전통적 지지층에게마저 비호감 1위 정당이 된 데는 비례대표들의 정치적 무능이 컸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이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무비판적 과몰입도 문제였지만 진보정당이라면 응당 우선시 해야 할 의제를 잘못 설정해 지지층을 오히려 밀어내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얘기다.

정의당 비례대표 내부 선거 결과와 비례대표 순번. 19, 21위에 불과했던 류호정, 장혜영 후보가 청년 몫으로 비례대표 1, 2번이 됐다. 자료 정의당

정의당 비례대표 내부 선거 결과와 비례대표 순번. 19, 21위에 불과했던 류호정, 장혜영 후보가 청년 몫으로 비례대표 1, 2번이 됐다. 자료 정의당

“무능은 징계 대상은 아니지만, 책임질 이유는 된다.” 정의당 당원 게시판에 오른 의견 중 하나다. 실제로 정의당은 청년층 지지 확보를 이유로 지난 2020년 총선에서 비례대표 1, 2번을 청년 후보에게 할당했고. 그 결과 류호정·장혜영 의원이 국회의원이 됐다. 2년이 지난 지금 정의당의 청년 지지율은 올랐나. 참고로, 대선 직전 한 여론조사에서 30대 남성의 정의당 지지율은 0%가 나왔다. 이처럼 실패한 게 분명한 당 전략을 수정하지 않는 지도부를 상대로 당원들이 노선 변경 투쟁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당원들은 대통령이라는 최고 권력자도 끌어내린 시대에 비례대표쯤이야 제 역할을 못 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탈권위 시대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그렇다면, 다른 정당도 지리멸렬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왜 정의당에서만 유독 비례대표 전원 소환이라는 충격요법식 처방이 나타난 걸까. 계파 중심의 거대 정당과 달리 당비를 낸 당원이 주도하는 진성 당원제라는 전통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비단 정의당이 아니라 다른 당에서도 근본(?)을 알 수 없는 대중이 당원 가입서를 들이밀며 ‘자기 몫’을 요구하고, 정당의 기존 질서까지 뒤흔드는 일을 훨씬 더 자주 목격하게 될 거다.

작금의 정의당 사태 속에서 일부 인사들이 현직 의원을 이을 후순위 비례대표 승계자들의 자질 문제를 들며 ‘바꿔봐야 소용없다’는 논리를 펴는 걸 봤다. 이는 이번 당원총투표 발의 운동의 속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발언일 뿐이다. 가결이든 부결이든 이 사태의 의미는 바뀌지 않는다.

그 의미란 진보정당을 표방한 정의당이 다른 기득권 거대 정당과 달리 ‘특별하게’ 대접받던 시대가 끝났다는 거다. 그간 정의당 의원들은 똑같은 국회의원이어도 대중에게 기득권자나 권력자로 인식되진 않았다. 비록 작은 정당이지만 비주류의 고된 길을 걸으면서까지 우리 사회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애쓴 사람들이라는 긍정적 평판을 기반으로 도덕적 우위를 점하곤 했다. 고 노회찬 의원이 대중적 인기를 끈 데는 그가 의정 활동도 있겠지만 과거 그가 할애한 헌신의 시간이 인정받았기 때문일 거다.

그런데 창당한 지 10년이나 되는 ‘나이 든’ 정당인 정의당은 지금까지 무얼 보여줬나. 특히 비례 의원들은 자신의 생물학적 젊음으로 자신의 정치적 무능력을 변명해오진 않았나.

정의당 심상정 대선 후보가 지난 3월 10일 당 개표 상황실에서 당원들에게 사과하고 있다. 심 후보는 대선에서 2.4%의 표를 얻었다. 앞선 대선보다 지지 기반이 확 줄었다. 뉴스1

정의당 심상정 대선 후보가 지난 3월 10일 당 개표 상황실에서 당원들에게 사과하고 있다. 심 후보는 대선에서 2.4%의 표를 얻었다. 앞선 대선보다 지지 기반이 확 줄었다. 뉴스1

정의당이 지금 이 사태를 대처하는 모습도 매우 실망스럽다. 정의당 비대위원들을 비롯해 전직 당 대표, 전직 국회의원, 차기 당 대표 출마 예정자 등 이른바 지도부인 이들은 지금 SNS에 ‘압도적 반대표로 부결시키자’는 입장을 앞다투어 게재하고 있다. 사퇴권고 대상자들은 총투표 반대 측 홍보물에만 ‘반성한다’는 입장문을 냈을 뿐이다. 전혀 진보정당답지 않은, 관료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대처다.

이런 안일한 대응은 지금 정의당 지도부인 브라만 좌파들이 이번 총투표의 성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보여준다. 이번 투표는 '사퇴 권고안'에 대한 개인적 취향을 드러내는 인기투표가 아니라, ‘이대로는 안 된다. 못 살겠다 갈아엎자’는 아래로부터의 아우성이다. 제대로 된 당 리더라면 ‘찬성파의 이런 점이 우려스럽다’는 의견 표시는 할 수 있어도 총투표를 발의한 취지 자체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투표는 4일까지다. 부결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하지만 애초에 많은 사람이 당원총투표 발의 조건인 5% 서명 채우는 것도 힘들다고 예상한 것도 보기 좋게 빗나가지 않았나.

어떤 결과가 나오든 정의당 당원총투표 사태는 모든 정당이 마주하게 될 불편한 미래라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일부 정치 엘리트가 일반 대중 지지자들을 지휘하는 형태의 기존 정당 정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21세기 들어 신선한 돌풍을 일으킨 정당들은 하나같이 아래로부터 대중을 강력하게 동원하는 급진민주주의 전략에 호소했다. 디지털 기술에 기반한 직접민주주의 정당인 스페인 포데모스, 부패 권력을 신랄하게 풍자하면서 경쾌하게 등장한 이탈리아 5성 운동이 일으켰던 돌풍을 생각해보라.

2018년 이탈리아 총선에서 33% 득표로 제1당으로 부상한 '플랫폼 정당' 오성운동의 핵심 3인방. 왼쪽부터 루이지 디마이오 대표, 창당을 주도한 코미디언 출신 베페 그릴로, 당의 숨은 실세인 IT 사업가 다비데 카살레조. 로이터=연합뉴스

2018년 이탈리아 총선에서 33% 득표로 제1당으로 부상한 '플랫폼 정당' 오성운동의 핵심 3인방. 왼쪽부터 루이지 디마이오 대표, 창당을 주도한 코미디언 출신 베페 그릴로, 당의 숨은 실세인 IT 사업가 다비데 카살레조. 로이터=연합뉴스

현재 우리나라 정치가 직면한 쟁점은 양당제냐 다당제냐가 아니다. 양당이든 다당이든 정당이라는 정치 공동체의 내부구조(질서·문화 등)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 모두 변할 수밖에 없는 시기에는 누가 먼저 변하는가가 생사를 가른다. 이런 시대에 기존 질서에 혼란을 준다는 이유로, 혹은 대안이 뚜렷하지 않다는 이유로,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대중의 폭발적인 요구를 억지로 억누른다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당원이 나서서 당 지도부 전체를 탄핵하려는 정의당 당원총투표는 앞으로 대한민국 정당들이 마주하게 될 미래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