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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커상 후보 정보라 작가는 왜 소장을 썼나…연세대 “강사법 이전 강의엔 퇴직금 못줘”

중앙일보

입력

정보라 작가의 작품 ‘저주토끼’가 지난 4월 7일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을 때, 정 작가는 소장을 준비 중이었다. 11년간 몸담았던 연세대학교를 상대로 한 소장이었다. “피고(연세대)는 원고에게 5000만원 및 이에 대하여 2022.3.15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20%의 비율에 의한 돈을 지급하라.”

연세대에서 10년간 러시아어, 러시아 문학 등을 가르쳐 온 정 작가는 지난해 12월 31일 사직했다. 사직하는 과정에서 퇴직금에 대해서 아무런 안내를 받지 못했고 신청 창구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소송 없이는 퇴직금을 받을 수 없겠다고 생각한 정 작가는 지난 2월부터 퇴직금 청구 소송을 준비해 지난 4월 서울서부지법에 소송을 제기했다.

소설 '저주토끼'로 부커상 인터네셔널 부문 최종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가 31일 오전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리는 재판에 앞서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기자회견에 참석해 입장을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소설 '저주토끼'로 부커상 인터네셔널 부문 최종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가 31일 오전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리는 재판에 앞서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기자회견에 참석해 입장을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 작가는 “대학 내 강사에 대한 비정규직 차별을 없애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다. 그렇게 원대한 목표를 내가 이룰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면서 “그렇지만 어쨌든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말했다.

법원 판례는 1시간 수업당 3시간 근로시간 인정…정 작가는?

‘정보라 대 연세대’ 소송의 쟁점은 정 작가의 근로 시간이다. 학교 측은 시간강사에게도 퇴직금을 주도록 한 ‘강사법(고등교육법 개정안)’이 시행된 2019년 8월 이후부터 근로기간을 계산해 퇴직금을 지급하겠다는 입장이다. 강사법 시행에 따라 과거 ‘시간강사’ 개념은 사라지고 주 6시간 이하 수업하는 강사도 ‘교원’ 지위를 얻게 됐다. 이때부터 강사는 1년 이상의 임용기간과 3년간 재임용 심사를 받을 권리를 보장받게 되면서 방학중에도 임금을 받을 수 있게 됐고 퇴직금도 받을 수 있게 됐다.

연세대 측은 이 강사법 시행전인 2010~2019년 1학기 정 작가가 1주일에 15시간 미만으로 근무한 초단시간 근로자이기 때문에, 이 기간에 대해서는 퇴직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는 입장이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사용자는 일주일 근로시간이 15시간 미만인 근로자에 대해 주휴수당과 유급휴가, 퇴직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

기존 판례는 시간강사 강의 시간의 3배를 근로시간으로 본다. 지난 2020년 유사한 소송에서 “대구대는 자연과학대학에서 수학을 강의하는 시간강사 황모씨에게 4960만 여원을 지급하라”라는 판결이 대구지법 항소부에서 나오기도 했다. 당시 재판부는 “강의라는 근로는 강의자료를 준비하고, 시험 및 제출 과제 등을 통한 수강생들에 대한 평가와 그와 관련한 학사행정업무의 처리 등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것으로서 그 근로시간을 강의시간만으로 한정할 수 없다”면서 “원고가 담당한 주당 강의시간의 3배수가 주당 소정근로시간으로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는 1심 판결을 인용했다. 이는 2002년 서울중앙지방법원, 2012년 의정부지방법원 등의 유사 판례에 따른 것이다. 아직 대법원의 판례는 없다.

소설집 '저주 토끼'로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가 지난 4월 14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있다. 연합뉴스

소설집 '저주 토끼'로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가 지난 4월 14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있다. 연합뉴스

정 작가는 2010년부터 한 학기에 6~9학점을 강의해 왔다. 정 작가는 “강의실에 쏙 들어가서 강의만 좌르르 하고 나오는 게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다. 유학을 고민하는 학생, 깊은 철학적 질문을 하는 학생들과 인간적으로 교사와 제자로서 소통해왔다”며 “그 과정을 몇 시간짜리라고 산정한다는 것 자체가 고등교육을 잘 모르는 처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연세대 측은 “법적 근거 없이 퇴직금 지급을 할 수는 없다. 현재로선 법 해석에 대한 입장 차이가 발생한 상황”이라며 “1심 판결을 기다려봐야 할 단계”라고 말했다.

박중렬 한국비정규교수노조 위원장은 “강사는 초단시간 근무자이기 때문에 퇴직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는 게 모든 대학의 공통된 입장”이라며 “소송을 통해서만 퇴직금을 지급받을 수 있는 게 현실이지만, 고용 불안과 소송비용에 대한 부담 때문에 많은 강사들이 퇴직금 청구를 꺼리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대학이 자발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교육부가 문제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전국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시간강사들의 퇴직금 청구 소송이 진행 중이다. 지난해 12월에는 국립대·사립대의 옛 시간강사 226명이 정부와 대학을 상대로 퇴직금과 주휴수당 등을 청구하는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해 7월에는 경상국립대와 경북대 강사 49명이 국가를 상대로 퇴직금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매주 20여명 글 하나하나 피드백하던 교수님” 

지난 4월 15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에서 한 시민이 정보라의 소설인 '저주토끼'를 살펴보고 있다.  뉴스1

지난 4월 15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에서 한 시민이 정보라의 소설인 '저주토끼'를 살펴보고 있다. 뉴스1

정 작가의 제자들은 뉴스를 통해 소송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하는 분위기다. 2017년도 2학기에 정 작가의 러시아문학 강의를 수강한 이은서(26)씨는 “교수님으로부터 예브게니 오네긴, 체호프를 배웠다. 늘 학생들의 의견에 관심이 많았고, 시험 문제도 학생 입장에서 논란의 여지가 없도록 꼼꼼하게 내는 분이었다”며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함께 계단을 내려가면서 논문 쓸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난다. 연구시간이 부족해 고생하는 와중에 작품 활동도 하셨는데, 퇴직금조차 못 받으셨다는 게 속상하다”고 말했다.

신모(26)씨는 “매주 쪽글을 써가는 게 과제였는데, 매번 20명 넘는 학생이 제출한 글을 다 읽고 각각 코멘트도 해주셨다. 문학 수업이었지만 관련된 문예 이론과 문화사도 자료를 가져와 가르쳐 주셨다”며 “교수님이 맡은 강의가 많아서 당연히 정규직인 줄 알았는데 퇴직금 소송 뉴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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