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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일관성 없는 관치금융, 민심도 실리도 잃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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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스타 사태 20년의 교훈

외환은행 매각을 둘러싼 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와 한국 정부 간의 국제 분쟁이 마침표를 찍는 데 꼬박 10년이 걸렸다. 외환은행을 인수한 2003년을 기준으로 하면 20년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번 판정을 수용하기 어렵다며 판정 취소를 신청하기로 했다.

31일 법무부에 따르면 미국 워싱턴 소재 세계은행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 (ICSID) 중재 판정부는 “한국 정부가 론스타에 2억1650만 달러(약 2855억원, 환율 1300원 기준)를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론스타가 당초 배상을 요구한 46억8000억 달러(약 6조1000억원) 대비 4.6%에 해당한다. 중재 판정부는 한 달 만기 미국 국고채 수익률만큼 10년치 이자(185억원)도 지급하라고 판정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가 론스타에 물어줄 돈은 약 3000억원이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이날 “정부는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매각 승인심사 과정에서 국내 법규와 조약에 따라 차별 없이, 공정, 공평하게 대우했다는 일관된 입장”이라며 “비록 론스타가 청구한 액수보다 많이 감액되긴 했지만 판정에 대해 수용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정부는 중재 판정부 3명 중 1명이 “론스타 측 주가조작 과실 상계로 한국 정부의 배상액은 0원”이라고 소수의견을 낸 것을 근거로 120일 안에 판정 취소를 신청하는 이의 제기 절차에 들어갈 계획이다. 다만 국제투자분쟁 중재 판정은 기본적으로 단심제여서 ICSID 취소위원회가 판정 취소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더 이상 구제 절차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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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는 한국 정부와 론스타의 20년 악연을 돌아보면 한국 자본시장의 미성숙함, 정부의 관치금융, 일관성 없는 잣대(규제), 외국 자본에 대한 과도한 반감 등의 한계가 드러났다고 진단한다.

시작은 1997년 외환위기였다. 외환위기 여파로 2002년에 외환은행이 인수합병 시장에 매물로 나왔지만, 나서는 기업은 없었다. 대규모 자금을 끌어올 경영 참여형 사모펀드(PEF) 시장도 걸음마 단계였다. 론스타가 입찰을 거치지 않고 외환은행을 품을 수 있었던 이유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당시엔 재무적투자자(FI) 등을 모아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시도조차 어려울 만큼 자본시장은 규제나 제도 면에서 미성숙했다”고 평가했다.

정부 “배상 결정 수용 어려워” 판정 취소 신청 나선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31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론스타 국제투자분쟁(ISDS) 판정 관련 브리핑에서 “판정을 수용하기 어렵다”며 판정 취소 신청 등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31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론스타 국제투자분쟁(ISDS) 판정 관련 브리핑에서 “판정을 수용하기 어렵다”며 판정 취소 신청 등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외환은행 ‘헐값 매각’ 논란이 일기 시작한 건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한 이듬해(2004년)다. 외환은행 주가가 뛰면서 론스타는 지분 투자만으로 1조원 상당의 평가차익을 거뒀다.

외국계 자본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커지자 정치권이 가세했다. 당시 최경환 한나라당 의원은 2005년 국정감사에서 “정부가 외환은행 헐값 매각을 주도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국회의 감사 청구로 감사원은 2006년 특별 감사에 나섰고 감사원은 그해 6월 외환은행이 헐값 매각됐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이후 검찰은 헐값 매각과 ‘외환카드 주가조작’ 사건을 수사했다. 유회원 전 론스타 대표는 론스타가 외환카드를 헐값에 M&A하기 위해 ‘허위 감자(減資)설’을 퍼뜨려 주가를 조작했다는 혐의로 기소됐고 2012년 징역 3년을 확정받았다. 론스타 펀드 역시 벌금 250억원 유죄가 확정됐다.  당시 수사팀에는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 조상준 국정원 기조실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등이 참여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헐값 매각’ 논란에 기름을 부은 건 론스타다. 인수 금액의 3배 수준(6조원 이상)에 외환은행을 팔겠다고 나서며, 론스타는 헐값 매각에 이은 ‘먹튀’라는 오명을 썼다. 일부 전문가는 론스타의 ‘먹튀’를 막으려던 금융당국의 대처가 소송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본다. 한국 정부가 외환은행 매각 승인을 부당하게 미루는 바람에 외환은행 가격이 내려가 론스타가 손해를 입었는지가 지난 10년 소송의 쟁점이었다. 대주주 적격성 관련한 외환카드 주가조작 재판이 이어져 인수 승인이 지연됐다는 게 한국 정부의 입장이었다. 이에 대해 론스타 사건의 중재 판정부는 “(한국) 금융당국이 매각 가격이 인하될 때까지 승인을 지연한 행위는 (한국의) 권한 내 행위가 아니므로 공정·공평 대우 의무 위반에 해당한다”며 론스타 측 주장을 일부 받아들였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국내외 자본이 경쟁하는 시대에 과거와 같은 관치금융은 국제 소송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외국 자본에 대한 과도한 반감도 론스타 사태를 키웠다는 시각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권 관계자는 “만일 론스타가 아니라 토종 자본이 외환은행을 인수해 돈을 벌었다면 정치권은 물론 정부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한국 사회가 상대적으로 외국계 자본에 대한 반감이 큰 편”이라고 말했다.

오락가락했던 규제도 금융당국의 책임론이 불거지는 이유다. 특히 론스타가 산업자본인지에 대한 판단인 ‘첫 단추’를 잘못 꿰자 논란은 이어졌다. 은행법에 따르면 ‘은산분리’로 산업자본이 의결권 있는 은행 주식을 4% 이상 가질 수 없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부실 금융기관의 정리 등 특별한 사유로 론스타의 인수를 승인했다. 당시 외환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6.16%)이 8% 밑으로 떨어지는 등 부실 우려가 커졌다고 판단하고 예외를 적용했다. 하지만 인수 2년 뒤 해당 BIS 비율이 조작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헐값 매각 논란은 불법 매각 논란으로 확대됐다.

론스타가 2012년 외환은행을 하나금융에 팔 때도 금융당국은 “론스타는 2010년 말 기준 산업자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면서도 “현시점에서 론스타를 산업자본으로 볼 근거는 없다”고 애매모호한 결론을 냈다. 그러다 보니 국제소송에서 론스타는 산업자본으로 ‘외환은행을 인수할 자격이 없었다’고 대응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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