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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전 ‘변양호 신드롬’ 다시 회자…론스타 배상금, 예산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국 정부가 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에 약 2900억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정이 31일 나왔다. 한국 정부가 ‘시간 끌기’를 한 탓에 외환은행을 제값에 팔지 못했다는 론스타 주장을 국제중재기구인 세계은행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가 일부 받아들였다. 2억1650만 달러를 지급하라고 결론 났는데 2012년 론스타가 청구한 손해배상금 46억7950만 달러의 4.6%에 해당한다.

관가에선 ‘변양호 신드롬’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이 용어 자체가 론스타와 얽혀 탄생했다. 2003년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파는 결정을 내렸던 변양호 당시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금융정책국장이 이후 헐값 매각 논란에 휩싸여 2006년 구속된 일이 계기가 됐다. 이후 그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지만 공직사회에선 책임질 만한 결정은 미루거나 회피하는 ‘변양호 신드롬’이 번졌다.

익명을 요구한 기재부의 한 국장은 “론스타 외환은행 사건을 계기로 공직 내부 분위기가 크게 바뀐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엔 외환위기도 그렇고 외환은행 매각도 그렇고 모두 처음이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를 계기로 의사 결정 구조나 시스템, 제도도 많이 바뀌지 않았느냐”며 “그런데 또다시 론스타 배상금 책임론이 불거지면 가뜩이나 위축된 공직사회가 더 움츠러들 것 같다”고 전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31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소비자 단체 간담회에 참석하며 론스타 관련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뉴스1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31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소비자 단체 간담회에 참석하며 론스타 관련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뉴스1

관가의 우려대로 책임론이 거론되는 분위기다. 공무원(정부)과 금융업계 잘못으로 수천억원 배상금을 국민 세금으로 물어주게 생겼는데 책임지거나 처벌받는 사람은 없다는 비판이다.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 과정에 얽혀있는 공직자나 하나금융지주 등에 구상권을 청구할 수도 있다. 다만 혐의와 대상을 특정하기 쉽지 않고 개인으로부터 수천억원을 징수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야당의 공세는 이미 시작됐다. 이날 박성준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윤석열 정부 경제 라인을 이끄는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과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이명박 정부 당시 무능한 정책 결정으로 수천억 혈세 낭비 참사의 단초를 제공한 장본인”이라며 “특히 추 부총리는 지난 2003년 재경부 은행제도과장으로 재직하며 론스타에 외환은행을 매각하는 과정에도 관여해 이번 참사의 시작과 끝이다. 론스타 혈세 낭비 사태에 책임 있는 경제 라인을 재점검해야 한다”고 밝혔다.

론스타가 요구한 수조원대 배상금 전액을 물어내는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 하지만 2900억원 배상금에 지연 이자까지 더하면 정부가 부담해야 하는 금액이 3000억원 안팎에 이른다. 법무부가 이번 판정에 불복해 이의 제기를 하기로 가닥을 잡아 시간은 벌었지만, 최종 지급 판단이 나오면 결국 나랏돈으로 메워야 한다.

정부 예산엔 당연히 반영돼 있지 않다. 가능한 방법은 ▶기존 예산에 있는 ‘비상금’ 성격의 예비비를 사용하거나 ▶차기 연도 예산 심사 과정에서 국회 동의를 거쳐 관련 예산을 추가하거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는 등 정도다. 유례가 드문 수천억원대 배상금인 만큼 절차는 만만치 않다.

예산회계특례법상 예비비는 원칙적으로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한 활동’에 쓰이게 돼 있다. 코로나19 같은 대규모 감염병 대응, 태풍ㆍ홍수 등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 복구비 충당 용도로 가능하다는 의미다. 배상금 지급 용도로 예비비를 당겨 쓰기는 법규상 쉽지 않고 국회 동의를 받아야 한다. 추경 편성, 예산 수정도 마찬가지다.

기재부 당국자는 “법무부가 이의 제기를 하기로 한 만큼 소송이 수년 더 이어질 수 있고, 배상금을 지급하기로 최종 결론이 난다 해도 금액이 큰 만큼 분할 지급하는 쪽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며 “정확히 예산이 얼마가 필요하고 어떻게 확충할지 논의하기엔 아직 너무 이르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논란은 피해갈 수 없을 전망이다. 한국 정부가 투자자ㆍ국가 간 소송(ISD)에서 져 수천억원 배상금을 나랏돈으로 토해내야 할 위기에 몰린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다. 2018년 이란 다야니 가문과의 ISD에서 패소해 730억원을 지급하게 된 일이 있지만 론스타 건과는 결이 다르다.

다야니 가문이 소유한 엔텍합은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로부터 대우일렉트로닉스를 인수ㆍ합병(M&A)하는 과정에서 계약보증금 578억원을 지급했다. 그런데 캠코는 투자 확약서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를 들어 매매 계약을 해지했다. 다야니 가문은 이에 반발해 캠코가 가져간 계약보증금에 이자를 더해 935억원을 반납하라고 ISD를 제기했고, 결국 730억원을 반납하라는 판정이 내려졌다.

올 4월 정부는 다야니 가문에 730억원 중 614억원을 지급했는데 다야니 가문으로부터 받아뒀던 500억원대 계약보증금으로 대부분 금액을 충당했다. 순수하게 국가 세금으로 3000억원 안팎 배상금을 지급해야 하는 론스타 사례와는 차이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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