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트랙터 타고 낙동강 건너 빚은 '명품 술'…팔도 애주가 홀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안동 술 기행③ 진맥소주

Prologue

“안동을 상징하는 문화 콘텐트는 의외로 술입니다. 안동이 유교의 고장이기 때문입니다. 유교 공동체는 조상께 올리는 제라는 의식을 통해 유지되고 지속될 수 있었지요. 제사에서 반드시 필요한 제물이 술입니다. 요즘도 안동에는 한 달에 한 번 이상 제사를 드리는 종가가 열 곳이 넘습니다.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안동 장씨, 진성 이씨, 예안 이씨, 영천 이씨, 광산 김씨, 의성 김씨, 풍산 류씨 등등... 한두 세대 전만 해도 가문마다 제사에 올리는 술을 따로 빚었었지요. 접빈객의 문화도 여전합니다. 손님이 오시면 술을 내는 전통이 안동에는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의 삶은 여전히 안동의 일상입니다. 안동을 이해하려면 안동의 술을 이해해야 합니다.”

경북 안동의 한국정신문화재단 권두현(56) 관광연구지원센터장이 십수 년 전부터 해오던 말입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전통 문화의 핵심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오느냐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 전통주 시장이 최근 들어 고속 성장 중입니다. 지난해 전통주 시장이 사상 최초로 전체 주류시장의 1%를 넘었다지요(출고금액 기준). 추석 명절을 앞두고 안동의 술을 소개하는 연재기획을 준비했습니다. 안동에는 안동소주만 있는 게 아닙니다. 개발한 지 3년 밖에 안 된 와인과 국내 유일의 밀 소주는 없어서 못 팔 정도입니다. 명인이 빚는 안동소주부터 120년 묵은 막걸리까지 안동의 술 네 개를 차례로 소개합니다. 오늘은 세 번째 순서로 국내 유일의 밀 소주인 ‘진맥소주’를 맛봅니다.

관련기사

드론으로 촬영한 안동 맹개마을. 낙동강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다. 밀은 여름 전에 수확을 끝냈고, 요즘은 메밀이 꽃을 피우는 계절이다.

드론으로 촬영한 안동 맹개마을. 낙동강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다. 밀은 여름 전에 수확을 끝냈고, 요즘은 메밀이 꽃을 피우는 계절이다.

맥주는 보리로 만들고, 소주는 쌀로 만든다.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소주는 밀로도 만든다. 그러고 보니 밀 소주가 더 그럴듯하다. 소주는 고려 시대 몽골이 전파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중앙아시아 대륙을 헤집던 몽골군에게 쌀보다는 밀이 더 친숙하지 않았을까?

2019년 우리나라에 밀로 빚은 소주가 나왔다. 이름하여 ‘진맥소주’.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맹개마을의 ‘맹개술도가’ 제품이다. ‘진맥소주’는 출시하자마자 바람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밀 소주라는 희귀성과 높은 가격이 팔도 애주가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이어 술맛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국내 전통주 시장의 뜨거운 이슈가 되었다. 국내에서 하나뿐인 밀 소주가 나오기까지의 이야기는 길고도 흥미진진하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다

맹개술도가 박성호 대표. 잘 나가던 IT 사업가였던 그가 유기농 밀 농사를 짓는 농부이자 밀 소주를 만드는 양조인으로 변신했다.

맹개술도가 박성호 대표. 잘 나가던 IT 사업가였던 그가 유기농 밀 농사를 짓는 농부이자 밀 소주를 만드는 양조인으로 변신했다.

“안동이 고향이 아니니까 귀향은 아니지요. 농사를 지어본 적 없으니 귀농도 아니고요. 조용히 살 곳을 찾다가 운명처럼 이곳을 알게 됐어요. 길을 잃어 잘못 들어왔다가 발견했거든요. 처음엔 눈이 번쩍 뜨이더라고요. 하늘이 점지해준 땅 같았어요. 그때부터 땅 주인을 찾아다녔죠. 땅 팔라고요.”

‘맹개술도가’ 박성호(53) 대표가 맹개마을에 정착하게 된 사연을 들려줬다. 한때 그는 잘 나가는 IT 사업가였다. 독일 유학을 갔다 온 뒤 1997년 공연과 인터넷을 연결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길 10년, 도시 생활에 지친 그는 쉴 땅을 찾아 나섰다. 전국을 돌아다니다 맹개마을에 들어온 게 2007년이었다. 전기도 없고 상수도도 없는 마을이었다.

맹개마을에 들어가려면 트랙터를 타야 한다. 박성호 대표가 모는 트랙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는 모습.

맹개마을에 들어가려면 트랙터를 타야 한다. 박성호 대표가 모는 트랙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는 모습.

맹개마을은 그림 같은 마을이다. 행정구역은 안동에 속하나 산세는 봉화 청량산과 이어진다. 안동 북쪽 끄트머리 낙동강변에 있는데, 낙동강이 마을 앞을 돌아나가고 마을 뒤는 우뚝 선 산이 가로막는다. 강을 건너거나 가파른 산을 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육지 속 섬 같은 마을이다. 지금도 마을에 들어가려면 박 대표가 모는 트랙터를 타야 한다. 맹개마을의 ‘맹개’는 모래를 뜻하는 안동 사투리다. 옛날 마을 앞에 고운 모래가 깔렸었단다. 지금은 거친 자갈이 더 많다.

맹개마을 풍경이 그림 같다고 한 건, 퇴계 이황(1501∼1570)의 문장이다.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살던 퇴계는 여러 번 청량산을 여행했다. 퇴계가 집에서 청량산까지 걷던 약 18㎞ 길을 ‘예던길’이라 한다. 그 예던길이 맹개마을 앞을 지난다. 지금은 청량산 전망대가 있는 도산면 원천리 언덕에 오르면 멀찌감치 서 있는 청량산과 청량산 아래 비죽 고개 내민 맹개마을이 보인다. 이 언덕에서 퇴계는 친구를 기다리다 다음과 같은 시편을 남긴다. 1564년 퇴계의 마지막 청량산 유산(遊山)에서였다.

‘산봉우리 봉긋봉긋 물소리 졸졸/ 새벽 여명 걷히고 해가 솟아오르네./ 강가에서 기다리나 임은 오지 않아/ 내 먼저 고삐 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드론으로 촬영한 맹개마을. 낙동강이 삼 면을 포위하고 마을 뒤편은 산이 가로막고 있다. 맹개마을은 육지 속의 섬이다.

드론으로 촬영한 맹개마을. 낙동강이 삼 면을 포위하고 마을 뒤편은 산이 가로막고 있다. 맹개마을은 육지 속의 섬이다.

이 그림 같은 마을에 들어간 IT 사업가는 생전 처음 농사에 도전한다. 농사를 지어본 적 없으니 처음에는 농사를 지을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맹개마을은 농사가 잘되는 땅이었다. 10만㎡(3만여 평) 땅에 이것저것 심어보다 밀과 메밀이 혼자도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이라는 걸 알고 밀과 메밀에 집중했다. 100% 유기농이다. 농약 칠 생각도 없었지만, 일손도 없었다.

“밀을 수확해서 팔았어요. 농사는 잘됐는데 돈이 안 됐어요. 1년을 꼬박 농사지었는데, 서울에서 받던 한 달 월급 정도밖에 안 나오더라고요. 밀로 뭘 할까 궁리하다 술을 생각해냈어요. 독일에서 와인 소믈리에 자격증도 땄었고, 술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요. 안동이 소주로 유명하니까 소주로 정했지요. 이렇게 해서 국내 유일 밀 소주가 나오게 됐습니다.”

명품의 탄생 

저장고에서 촬영한 '진맥소주'. 맨 왼쪽이 오크에서 숙성한 54.5도 소주 '시인의 바위'다. 검은 라벨의 소주가 53도, 그 오른쪽이 40도, 맨 오른쪽이 22도다.

저장고에서 촬영한 '진맥소주'. 맨 왼쪽이 오크에서 숙성한 54.5도 소주 '시인의 바위'다. 검은 라벨의 소주가 53도, 그 오른쪽이 40도, 맨 오른쪽이 22도다.

IT 사업가답게 박 대표는 체계적으로 밀 소주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소주 내리는 방식은 안동소주 전통 방식을 따랐다. 누룩은 쌀 대신 밀로 빚었지만, 밑술을 78도까지 끓이는 상압식을 선택했다. 대신 독일에서 증류기 부품을 들여와 깔끔한 맛과 향을 살렸다.

한창 술을 연구하던 시절, 광산 김씨 집안에서 내려오는 『수운잡방』이란 요리서를 읽게 됐다. 이 책에서 밀로 빚은 소주에 관한 기록을 발견했다. 『수운잡방』은 1540년께 쓰인 요리서다. 조선 전기에 이미 밀로 소주를 빚었다는 기록을 읽고 박 대표는 확신이 생겼다. 어쩌면 안동소주의 시작은 쌀 소주가 아니라 밀 소주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진맥(眞麥)소주’라는 상표도 이 책에서 빌렸다. ‘진맥’은 밀을 뜻한다.

2018년부터 소주를 내린 박 대표는 2019년 10월부터 소주를 판매했다. 처음엔 한 달에 100병만 팔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하루에 100병씩 나간다. 더 팔고 싶어도 못 판다. 밀도 부족하고, 시설도 부족하다. 무엇보다 일손이 부족하다. 씨 뿌려 밀을 수확하는 일도, 누룩 빚고 밑술 담그고 발효시킨 뒤 증류해 소주 만드는 일도, 소주를 숙성시키고 병입하고 내다 파는 일도 박 대표가 손수 다 해서다. 국내에는 손수 농사지은 작물로 술을 빚는 양조장이 드물 뿐더러 유기농 통밀을 키워 밀 소주를 만드는 양조장은 아예 전례가 없다.

산 아래를 깎아 만든 맹개술도가 저장고. 오크통과 항아리 안에서 소주가 익어간다.

산 아래를 깎아 만든 맹개술도가 저장고. 오크통과 항아리 안에서 소주가 익어간다.

현재 판매 중인 ‘진맥소주’는 모두 다섯 종류다. 22도, 40도, 53도 세 종류는 항아리에서 숙성한다. 22도는 1년 이상 숙성하고 53년은 3년 숙성한다. 오크에서 2년간 숙성하는 소주는 두 종류가 있다. 40도와 54.5도. 숙성을 위해 마을 뒤편 산 아래를 파 저장고 안에 지었다. ‘진맥소주’를 마셔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높은 도수에도 순하게 넘어간다”고 말한다. 단맛이 강하고 향도 좋다. 소주보다는 몰트위스키 같은 느낌이었다. 오크 숙성 54.5도는 이름이 따로 있다. ‘시인의 바위(Poet’s Rock)’. 퇴계가 노래한 경암(景巖)에서 따왔다. 맹개마을 강 건너편에 있는 네모진 바위다.

‘진맥소주’는 비싸다. 여느 안동소주보다도 비싸다. 하나 한국 프리미엄 전통 소주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출시한 지 3년이 안 된 술이 세계적인 주류품평회에서 잇따라 수상하고 있어서다. 지난 5월 ‘진맥소주’ 53도가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 주류품평회(SFWSC)에서 2년 연속 ‘더블 골드’ 메달을 받았다. SFWSC는 일정 점수 이상을 받으면 ‘골드’ 메달을 주는데, ‘더블 골드’ 메달은 심사위원 40명 전원이 ‘골드’ 점수를 줬을 때 부여된다. 올해 SFWSC에 처음 출품한 오크 숙성 54.5도도 ‘더블 골드’ 메달을 받았다. ‘진맥소주’ 40도는 2년 연속 ‘골드’ 메달을 수상했다.

박 대표는 “이미 주문받은 양이 1년 치 생산량을 넘어섰다”고 말했다. “해외 진출을 꿈꾸고 있다”고 말할 때는 자신감도 읽혔다. 전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요즘, 우리 술도 한국을 알릴 수 있는 훌륭한 콘텐트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진맥소주

안동 맹개마을에 있는 맹개술도가.

안동 맹개마을에 있는 맹개술도가.

맹개술도가는 ‘팜스테이’로도 유명하다. 맹개마을에서 TV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촬영한 뒤 방문객이 부쩍 늘었다. 밀이 익는 6월, 메밀꽃이 피는 9월이 특히 아름답다. 박성호 대표가 30일 통화에서 “이제 막 메밀꽃이 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맹개마을 건너편에서 전화하면 박 대표가 트랙터를 끌고 강을 건너온다. 강물이 불면 트랙터 대신 모터 보트가 뜬다. 맹개술도가 팜스테이는 건물 세 동에 객실 7개가 있다. 주말에 이용하려면 보통 두 달 전에 예약해야 한다. 아침식사는 제공하나 다른 끼니는 직접 해 먹어야 한다. 마을 안에 가게가 없어 맹개마을에 들어올 때 먹을 것을 챙겨와야 한다. ‘진맥소주’는 온라인 쇼핑몰에서 살 수 있다. 다만 오크 숙성 40도 750㎖는 현대백화점에서만 팔고, 오크 숙성 54.5도 500㎖는 맹개술도가에 직접 주문해야 한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