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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그리스 음악의 재발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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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그리스 아테네에서 전 세계 음악학자들이 참가하는 2022년 국제학술대회가 지난 22~26일 열렸다. 서양 문화의 출발지이자 예술의 전통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던 그리스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아테네에서 개최되어 시작 전부터 주목받은 이번 행사에서 다양한 시대를 관통하는 그리스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사실 우리에게 그리스 음악은 관념적으로 더 익숙하다. 신과 인간이 공존하는 그리스 문화에서 음악은 신들의 발명품이다. 음악이라는 말의 기원이 되는 ‘무사이(Musai)’는 예술과 학문을 관장하는 아홉 명의 그리스 여신 이름이며, 그리스 신화 중 음악이 얼마나 인간의 감정을 움직일 수 있는가는 오르페우스 신화가 잘 보여준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도 음악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진리와 음악의 신으로 숭배된 아폴론은 균형과 절제를 추구하는 고전적 아름다움의 유형으로, 포도주와 춤의 신 디오니소스의 제례에 연주된 음악은 감정과 도취를 추구하는 낭만적 아름다움의 유형을 형성하며, 서양음악사에 중요한 축을 형성하였다.

서양음악사 첫 장 장식한 그리스
현장서 듣는 신화와 현대의 만남
음악은 우리를 고귀하게 만들어

지난 25일 그리스 아테네대 강당에서 열린 ‘3세기를 관통하는 그리스 음악’ 연주회 모습. [사진 오희숙]

지난 25일 그리스 아테네대 강당에서 열린 ‘3세기를 관통하는 그리스 음악’ 연주회 모습. [사진 오희숙]

그리스의 철학자들도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다. 수적 비율에 근거한 우주의 코스모스가 소리로 구현된 것이 음악이라고 본 피타고라스, 음악을 통해 인간의 윤리성이 고양된다고 본 플라톤, 음악의 즐거움과 카타르시스를 이야기한 아리스토텔레스, 이들 모두 이후 서양음악 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거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그리스 음악은 어떨까. 평소 음악회장에서 라이브 음악으로 거의 접할 수 없는 그리스 음악은 색다른 세계를 보여주었다. 특히 아테네대 철학대학 아울로스 강당에서 25일 열린 음악회는 인상적이었다.

‘3세기를 관통하는 그리스 음악’이라는 주제로 열린 음악회에서 아테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의 그리스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했다. 만차로스(N Mantzaros·1795~1872)의 칸타타 ‘엘리시아 밭의 오디세우스(Ulisse agli Elisi)’ 서곡은 행진곡풍의 경쾌함이 플루트와 오보에 독주의 서정적 선율과 대조되는 작품으로 금관과 타악이 클라이맥스를 힘차게 이끌었다. 사켈라리디스(Th Sakellaridis·1883~1950)의 오페라 ‘페로우즈(Perouze)’ 인터메초는 단조풍의 집시 선율과 민속적인 생동감이 아우러진 곡이었다. 바이올린의 유혹적인 선율, 2박 계통의 춤곡, 콘트라베이스와 바순의 개성적인 선율 등이 두드러지면서 다채로운 분위기 변화가 재미있게 펼쳐졌다.

네체리츠(A Nezerits·1897~1980)의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발레 음악’은 미뉴에트사라방드 등 여섯 곡 모음곡이었는데, 마지막 다이내믹의 변화가 강조된 지그에서는 그리스의 어느 마을에서 펼쳐지는 댄스파티를 연상시키는 민속적인 생동감이 느껴졌다. 젊은 세대 작곡가인 살라호리스(Ph Tsalahouris·1969~)의 ‘소아시아의 세 개의 댄스 이미지’는 현대적 어법이 활용된 흥미로운 곡이었다. 피치카토와 바이올린 독주가 음향적 대비를 이루며 웅장한 사운드를 펼쳤고, 미니멀 음악적 반복기법과 미분음 사운드 등이 곡을 주도하였다. 이국성을 띠는 5음음계 선율도 첨가되어 더 특색있게 느껴졌다.

처음 들어보는 작곡가들의 처음 들어보는 작품들! 그리스의 동시대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자체만으로 의미 있는 경험이었지만, 소리만으로 그리스의 정체성을 명확히 포착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곡의 중간중간에 나타나는 리듬감과 음악적 흐름 내면에 내재해 있는 여유로움은 그리스의 거리를 거닐며 느꼈던 자유의 분위기와 맞닿아있었다. 또한 신화 속의 그리스만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가 절묘하게 배합된 21세기 그리스를 느낄 수 있었다. 아테네대 교수 말리아라스(N Maliaras)가 이끈 아테네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아주 섬세한 음향을 들려주지는 못했지만, 거칠고 생동감 있는 특유의 사운드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스 음악은 음악 전공자라면 누구나 공부하는 『서양음악사』의 첫 장을 장식하지만, 그 이후에는 음악사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번에 그리스의 음악을 접하면서 그리스 음악의 역사는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스 음악가들에게는 아마도 그들의 방대한 유산이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부담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음악은 인간이 고귀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예술이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떠올리며 그리스 음악을 다시 들어본다.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