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감산” 외치자 기름값 다시 불붙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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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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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상승 압력을 낮췄던 기름값이 다시 들썩이고 있다. 물가 ‘피크 아웃(정점 통과)’을 기대하는 시장은 긴장 모드다. 유가가 다시 오르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자극해 각국 중앙은행이 보다 더 센 긴축에 나설 수 있어서다.

29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에서 10월물 미국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가격은 배럴당 97.01달러로 전 거래일(93.06달러)보다 4.2% 뛰었다. 지난달 29일(98.62달러) 이후 한 달 만에 최고다. 이날 런던 국제선물거래소에서 10월물 브렌트유 가격도 이달 중 가장 비싼 배럴당 105.09달러에 거래됐다. 내리던 기름값이 한 달여 만에 상승세로 돌아선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배럴당 130달러 코앞까지 치솟았던 국제 유가는 지난달 중순 제동이 걸렸다. 세계적인 경기 둔화 우려에 원유 수요가 줄고, 이란의 국제 원유 시장 복귀로 공급이 늘 것이란 전망 때문이었다. 지난 16일에는 WTI 가격이 전쟁 이전 수준인 배럴당 86.03달러까지 밀렸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유가가 다시 오르는 가장 큰 이유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감산 가능성이다. 최대 원유 수출국이자 OPEC의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이즈 빈 살만 에너지 장관은 지난 23일(현지시간)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시장 변동성과 유동성 축소로 OPEC이 감산에 나설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 달 5일(현지시간) OPEC과 러시아 등 비(非) OPEC 주요 산유국들의 협의체인 OPEC플러스(OPEC+) 회의에서 감산 계획이 논의 테이블에 오를 전망이다. OPEC+ 순회 의장인 브뤼노 장 리샤르이투아 콩고 에너지 장관은 최근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사우디의 감산 제안에 “우리의 견해·목표와 부합한다”고 말했다. OPEC+는 이미 이달 초 회동에서 9월 증산 규모를 7·8월의 하루 평균 64만8000배럴에서 10만 배럴로 대폭 줄였다.

여기에 아프리카 최대 산유국인 리비아의 정치적 혼란으로 원유 생산이 원활하지 않다는 점도 겹쳤다. 겨울철을 앞두고 유럽 국가의 에너지원인 천연가스 가격이 오르자 원유가 대체 수요로 떠오르는 것도 변수다. 전문가들이 연말까지 국제 유가(WTI 기준)가 다시 배럴당 100달러 선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하는 이유다. 황병진 NH투자증권 연구원은 “OPEC+의 감산 가능성과 리비아의 지정학적 리스크 등이 겹쳐 공급이 줄고, 천연가스 대체재로 원유 수요가 늘면 유가는 오를 수밖에 없다”며 “연말 무렵 국제 유가 상단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김소현 대신증권 연구원도 “유가를 끌어올리는 공급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며 “장기적으로 유가 전망치는 상단 기준 배럴당 125달러 선까지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기름값 하락세 두달만에 멈춰

기름값 하락세 두달만에 멈춰

문제는 국제 유가 오름세가 물가 상승 압력을 키우는 것이다. ‘물가 잡기’에 초점을 맞춘 각국 중앙은행은 국제 유가 흐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지난달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세(1년 전 대비 8.5%)가 다소 주춤한 데는 국제 유가가 하락한 영향이 크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최근 인터뷰에서 “(유가 상승 등) 외부 충격의 중요성을 고려했을 때 정확한 (금리 인상 중단) 시점을 알기 힘들다”고 밝혔다. 유가가 들썩이면 물가 정점 통과를 기대해 온 시장에 찬물을 끼얹는 셈이다.

더욱이 최근 잭슨홀 미팅에서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인플레 파이터’ 본색을 드러내며 강도 높은 매파(통화 긴축) 발언을 한 만큼 ‘국제 유가 급등→물가 상승→긴축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올해 유가가 인플레이션의 가장 큰 변수로 작용했다”며 “유가가 오르는 한 각국 중앙은행이 긴축의 고삐를 느슨하게 풀긴 힘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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