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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무명도 고수도 손에 땀 쥔 삼성화재배 예선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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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30일 삼성화재배 선발전 시니어조 결승에서 맞붙은 이창호 9단(왼쪽)과 김승준 9단. [연합뉴스]

30일 삼성화재배 선발전 시니어조 결승에서 맞붙은 이창호 9단(왼쪽)과 김승준 9단. [연합뉴스]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난 숨은 고수가 세계대회를 제패하는 그런 일은 없을까. 실력만 있으면 누구나 참가하여 우승컵을 따낼 수 있는 ‘오픈대회’는 바로 그런 기적을 꿈꾸는 대회다. 2022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한국예선이 열리는 날. 참 오랜만에 한국기원을 찾았다. 지난 몇 년은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대국으로 간신히 지탱해왔다. 그러나 대회라면 역시 얼굴 마주 보고 상대 숨소리도 들으며 대국을 치러야 제맛이 난다.

일반조에는 프로 138명에 아마추어 12명까지 150명이 출전했다. 이들에게 주어진 본선 티켓은 7장. 21.4대1의 좁은 문이다. 따로 예선을 치른 아마추어의 경우 128대1까지 올라간다. 아는 얼굴은 별로 없다. 매년 17명이 입단하는 데다 코로나와 마스크로 인해 얼굴 볼 일이 없었다. 선배 프로들조차 “누군지 잘 모르겠다”고 한다.

본선 32강에 가면 시드를 받은 신진서, 박정환, 커제 같은 무서운 선수들이 잔뜩 기다린다. 그러니 무명 선수의 우승은 ‘오즈의 마법사’ 같은 기적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골프를 보면 가끔 사건이 벌어진다. 박세리 선수가 US오픈에서 연장전으로 우승을 다퉜던 상대도 아마추어였다. 바둑은 다른 종목에 비해 의외성이 적다. 승부는 운이 많이 지배하지만 운도 실력이 비슷할 때 얘기다. 그래서 예선전이 펼쳐지는 대국장은 고요하다. 신진서를 꿈꾸는 소년 기사들의 희망, 도전과 함께 모종의 체념, 비감이 공존한다.

여자조는 35명이 출전했고 단 한명이 본선 32강 티켓을 받는다. 저쪽에 무적의 강자 최정 9단이 보이고(그는 여자기사로는 유일하게 수차례 32강에 올라 남자 강자들을 꺾은 이력이 있다) 그의 라이벌 오유진 9단도 보인다. 이제 ‘큰 언니’가 된 조혜연 9단과 15세 김은지 3단도 고개를 숙인 채 대국에 몰두하고 있다.

시니어조(45세 이상) 역시 1명 선발. 24명이 출전했다. 머리가 하얀 서봉수 9단이 역시 머리가 하얀 문명근 9단과 대국중이다. 문명근은 진주의 터줏대감이다. 대국료도 없지만 대국을 하고 싶어 왔다.

삼성화재배는 본선 티켓을 따내 32강에 오르면 비로소 500만원을 받게 된다. 이후 이길 때마다 상금이 올라 준우승 1억원, 우승은 3억원을 받는다. 물론 시니어 선수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그래도 열심히 시합에 나서는 것은 이곳 대국장에 오면 설렘과 긴장, 살아있다는 느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창호는 2년 전 시니어로 편입됐다. 한때 세계대회를 모조리 휩쓴 무적의 고수였고 삼성화재배만 3번 우승한 이창호가 이곳에서 대국하는 모습은 마치 평행우주처럼 낯설게 다가온다.

기사실에선 김종수, 김일환, 백성호 9단 등이 흥겨운 복기판을 벌이고 있다. 익숙한 풍경이다. 복잡한 AI 정석이 나오자 저쪽의 소년기사를 불러 물어본다. 소년은 척척 변화를 보여준다. 이 AI 정석은 변화가 복잡하여 정석 하나만으로 책 한권 분량은 될 것이다. 시니어들은 이제 이런 정석을 외우는 건 불가능하다.

30일 오후 1시. 드디어 본선 진출을 결정하는 9판의 결승전이 시작됐다. 아마추어 중에선 4강까지 진출한 김다빈이 최고 성적. 일반조의 이변이라면 랭킹 15위의 설현준이 69위의 유오성에게 패배한 것. 또 랭킹 10위의 이지현이 46위의 한우진(17세)에게 패배한 것.

여자조는 김은지가 오유진을 꺾고 최정과 마주 앉았다. 시니어조는 김승준 9단이 또 다른 전설 유창혁 9단을 제압하고 이창호와 대결한다.

오후 4시가 넘어서자 서서히 승부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일반조에서는 김명훈, 한우진, 원성진, 권효진, 유오성, 금지우가 차례로 승리했고 이형진이 마지막을 장식했다. 원성진을 제외하면 모두 새 얼굴이다. 여자조는 최정, 시니어조는 이창호가 기대를 어기지 않고 본선 티켓을 따냈다. 본선은 10월 27일 시작된다.

박치문 바둑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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