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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세에도 진취적인 크레머, “관대함은 인생의 만병통치약”

중앙일보

입력

75세에도 진취적인 마음가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사진 크레디아

75세에도 진취적인 마음가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사진 크레디아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75)가 자신이 창단한 앙상블인 크레메라타 발티카와 내한한다.
다음달 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5년 만에 펼쳐지는 이번 공연은 크레메라타 발티카의 창단 25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를 띤다. 크레메라타 발티카는 네 명의 핵심 창립 멤버와 여러 명의 젊은 음악가로 구성됐다. 공연 전 진행한 서면 인터뷰에서 크레머는 이 악단을 “진리를 탐구하고 호기심, 유연한 정신, 발견의 기쁨을 공유해온 진정한 가족”이라고 설명했다. 25년을 이끌어온 비결은 “풍부한 경험과 특유의 정체성을 위한 스스로의 동기부여”라고 밝혔다.

크레머는 라트비아 리가의 독일계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 모두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였고 할아버지는 리가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악장이었다. 네 살 때부터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전설적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제자로 8년 동안 연주했다.
1969년 파가니니 콩쿠르, 1970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잇달아 우승하고 서방에 망명했다. 카라얀, 번스타인 등 지휘 거장들과 협연하면서 최고의 연주자로 우뚝 섰다. 스승 오이스트라흐는 풍부하고 따뜻한 음색에 선이 굵고 스케일이 큰 연주를 들려줬다. 크레머는 그 전통에 안주하지 않았다. 연주와 레퍼토리 모두 끊임없이 독자적인 길을 모색한 개척자였다.

그는 아르헨티나 작곡가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누에보 탱고를 적극적으로 해석해 클래식 음악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20세기말 전 세계에 일었던 ‘탱고 붐’은 크레머로부터 촉발됐다. 크레머는 “아스토르(피아졸라)만큼 열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는 작곡가도 드물다”며 “아스토르의 음악은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극단의 두 감정은 잘 어울리는 매력적인 조합이다.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인 슈베르트 음악에서도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크레머의 슈베르트 해석은 정평이 나 있다. 피아니스트 발레리 아파나시예프와 함께한 소나티네, 현악 5중주의 현악 오케스트라 편곡 버전 등이 특별하다. “심오하고 영혼을 감동시킨다. 21세기에도 계속 몰입할 수 있는 동시대성을 가졌다”고 표현한 슈베르트의 음악을 이번 공연 프로그램에도 넣었다.

2부에 연주되는 ‘또 하나의 겨울나그네’가 그것. “늘 여러 양식과 악보, 시대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기를 원했다”는 크레머는 슈베르트를 매개체로 선택했다.

자신이 창단한 앙상블인 크레메라타 발티카와 함께 포즈를 취한 기돈 크레머. 사진 크레디아

자신이 창단한 앙상블인 크레메라타 발티카와 함께 포즈를 취한 기돈 크레머. 사진 크레디아

크레머가 쉐르크쉬니테・라스카토프・키시네・오소킨스・데샤트니코프 등 현대 작곡가들에게 위촉했고 그들이 슈베르트 작품을 기반으로 편곡한 작품의 모음곡이다. 바이올린과 현악기들을 위한 편곡이란 점만 제외하고는 어떠한 제약도 두지 않고 자유롭게 작업하도록 배려했다. 크레메라타 발티카의 25주년과 크레머의 75세 생일을 위해 헌정된 이 곡은 올해 4월 에스토니아 리가에서 세계 초연됐다. 내한 전 26일 스톡홀름 발틱해 페스티벌에서도 연주했고 이번 내한무대가 아시아 초연이다.

이보다 앞선 공연 1부는 아르보 패르트(87)의 ‘프라트레스(형제들)’로 시작한다. 에스토니아 출신 작곡가 패르트는 중세음악의 선법을 이디엄으로 채택하고 그것을 '틴티나불라(Tintinabula)'라는 독창적 어법과 결합시켰다. 작은 종이라는 뜻의 ‘틴티나불라’는 종소리가 울리고 난 뒤에도 메아리치며 아련히 이어지는 잔상, 신비한 여음의 효과를 음악에서 구현해낸다.

‘프라트레스’에서도 무한히 반복되는 여섯 마디 주제를 통해 내면에서 끊임없이 몸부림치는 순간과 영원을 그리고 있다. 크레머의 패르트 연주는 언제나 영감으로 가득했다. 키스 자렛의 피아노와 연주한 1983년 녹음은 ‘타불라 라사’ 앨범(ECM)에 수록됐다. “수십 년 동안 정말로 아껴온 작품”이라며 “패르트와 때론 음악가로, 또 친구로서 인생의 절반을 함께했다”고 술회했다.

크레머와 크레메라타 발티카는 야캅스 얀체브스키스(30)의 ‘리그넘(나무)’와 아르투르스 마스카츠(65)의 ‘한밤중의 리가’ 등 라트비아 작곡가 두 명의 작품으로 1부를 마무리한다. 크레머는 “발트 3국 작곡가들이 우리를 위해 작곡한 새로운 음악을 연주하는 건 의무이며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문화를 알리고 있다”고 했다.

크레머와 크레메라타발티카는 서울공연 다음날인 3일 천안 예술의전당 무대에 선다. 2부 프로그램이 다르다. ‘또 하나의 겨울나그네’ 대신 우크라이나 작곡가 발렌틴 실베스트로프의 ‘메신저’와 루돌프 바르샤이가 편곡한 쇼스타코비치 실내교향곡 Op.110a를 연주한다.

크레머 역시 코로나 기간 동안 수많은 연주가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시련과 고난 속에서 조금 더 너그러워지는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몇 년간 인생에 대한 태도가 조금 바뀌었어요. 요즈음에는 관대함은 소유욕에 대한 최고의 백신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관대함은 인생에서 만병통치약입니다. 인생을 더 충만하고 행복하게 살게 해줍니다”

크레머는 DG・소니・넌서치・악센투스・ECM에서 120종이 넘는 음반을 녹음했다. 곧 ECM에서 새 앨범이 나온다며 제목이 ‘Song of Fate(운명의 노래)’라고만 밝혔다. “말을 아껴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길 바랍니다. 제 인생 슬로건 중 하나가 음악이 먼저(Prima la Musica)거든요.”

류태형 객원기자・음악칼럼니스트 ryu.tae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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