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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 못 막아 용서 빈다'던 충정공 민영환, 충정로에 서다

중앙일보

입력

충정로 민영환 동상. 김정연 기자

충정로 민영환 동상. 김정연 기자

"나라의 치욕과 백성의 욕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우리 민족은 장차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리라."

민영환 동상 충정로 이전

충정로의 시작점에 충정공의 동상이 섰다. 충정로는 1946년 민영환(1861~1905) 선생의 시호 '충정(忠正)'을 따서 지은 길 이름으로, 이제야 비로소 이름의 주인을 찾은 셈이다.

30일 오후 3시 서울 서대문구 종근당 건물 앞에서 충정공 민영환 동상 이전 기념식이 열렸다. 민영환 선생의 증손녀인 민명기 여사와 민홍기 씨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민영환 선생은 17세에 과거에 급제한 뒤 대한제국 말기까지 고위 관리를 지낸 인물이다. 고종 황제를 도와 조선은행 창립, '대한제국' 국가 제정, 장충단 건립 등에도 관여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늑약을 폐기해달라'는 상소를 올렸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사후에 고종 황제가 '충정' 시호를 내렸고, 해방 직후인 1946년, 당시 김형민 서울시장은 충정공의 별장이 있던 지역의 도로에 '충정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재 충정로는 충정로 사거리부터 서대문역 교차로까지, 약 800m 길이의 왕복 8차선 도로다.

충정로 민영환 동상. 김정연 기자

충정로 민영환 동상. 김정연 기자

충정공 동상은 1957년 서울 종로구 안국동 사거리에 처음 세워진 뒤 1970년에 종로구 돈화문 옆으로, 2003년 다시 종로구 조계사 인근 구 우정총국 터 근처로 옮겨졌다가 이날 충정로에 안착하게 됐다.
충정공 동상이 위치한 교통섬을 재정비해 독립기념관, 고려대학교 박물관 등에서 제공한 민영환 선생 관련 사진 자료를 동상 맞은편 벽에 걸어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새 장소에 우뚝 선 동상 발치에는 그가 국민에게 남긴 유서도 적혔다.

민명기 여사가 쓴 소설 '죽지 않는 혼'에 복기한 유서 '죽지 않는 혼'의 일부다. "대체로 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살 수 있는 것이니 (…)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이천만 동포에게 용서를 비노라."

충정로 민영환 동상. 김정연 기자

충정로 민영환 동상. 김정연 기자

민영환 선생의 증손자 민홍기씨는 기념식에 참석해 "2003년 돈화문 옆에 있던 동상을 조계사 인근으로 이전할 때, 옮겨가는 장소가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줄 수 없는 자리여서 마음이 무거웠었다"고 돌이키며 "오늘 새 위치에 자리한 동상을 보니 조상님께 죄를 지은 듯했던 마음의 짐이 날아가는 것 같다. 정말 기쁘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 견지동 우정총국에서 이전해 온 민영환 선생 동상 제막식이 서대문구 충정로 종근당 1층 광장에서 30일 열렸다. 이날 내빈들이 단상에 올라 원격으로 제막을 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20220830

서울 종로구 견지동 우정총국에서 이전해 온 민영환 선생 동상 제막식이 서대문구 충정로 종근당 1층 광장에서 30일 열렸다. 이날 내빈들이 단상에 올라 원격으로 제막을 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20220830

이날 기념식엔 이성헌 서대문구청장을 비롯해 서대문구의회 이동화 의장 등 구의원, 서울시의회 정지웅·문성호 의원, 주한 프랑스 대사관 세자르 카스트랭 정무참사관 등도 자리했다. 비가 내리는 날씨 탓에 인근 종근당 건물 주차장 야외에 천막을 치고 식을 진행했다.

이성헌 서대문구청장은 "을사늑약으로 자주권을 상실하는 걸 막지 못한 책임을 스스로 지고 유명을 달리하신 민영환 지사의 동상을 서대문구 충정로에 모시게 되어 매우 자랑스럽고 감사하다"며 "대한민국 역사가 존재하는 한 충정공이 나라를, 국민을 위했던 마음은 영원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 뜻을 이어받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는 곳으로 모셨다"고 설명했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나라가 어려웠던 상황에서 민영환 공은 '누군가가 책임져야 한다'며 본인이 나선, 대표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보였다"며 "제국주의 시대였던 19세기 말, 난세에서 조선이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 답답한 마음으로 혼자 고민했던 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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