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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조선소 빈자리 채운 원두향…‘커피섬’이 된 영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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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부산 중구 남포동과 영도구 대교동을 잇는 영도대교(214.7m). 차를 타고 영도로 들어가며 오른쪽을 보니 큰 선박 몇 척이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1912년 목선 등을 제조하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조선소인 다나카 조선소가 있던 ‘깡깡이 마을’(대평동)이다. 조선소에서 배를 수리할 때 망치로 때리는 소리가 마을 별칭이 됐다. 배에 그네 같은 줄을 매달고 앉아 망치로 녹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던 아지매(아줌마)를 ‘깡깡이 아지매’라 불렀는데 ‘자갈치·재첩국’과 함께 ‘부산의 3대 아지매’로 불린다.

1960~70년대 영도 조선소에서 그네줄에 매달려 배 녹을 제거하는 ‘깡깡이 아지매’들의 모습. 위성욱 기자

1960~70년대 영도 조선소에서 그네줄에 매달려 배 녹을 제거하는 ‘깡깡이 아지매’들의 모습. 위성욱 기자

이곳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봉래동은 1937년 한국 최초의 독(Dock·배를 만드는 작업장)이 있는 조선중공업주식회사(광복 후 대한조선공사→1990년 한진중공업)가 있던 곳이다. 사실상 영도는 대한민국 조선 산업 발상지이면서 1960~70년대 초반까지 대표적 조선산업 기지였다. 김명신 영도구 재생정책팀장은 “1911년 발행된 ‘부산시가전도’를 보면 당시 대평동과 봉래동에 영도와 부산 내륙을 잇는 ‘도선장’이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며 “드라마 ‘파친코’에 등장하는 영도 도선장이 이곳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후 영도는 이런 대형조선소와 수리조선소 등 각종 공장이 해안가를 따라 들어섰고, 이를 중심으로 배후 지역에 상업시설과 주거지 등도 조성됐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인구도 급격히 줄었다. 1978년 21만 4000여명이었던 인구는 올해 6월 말 11만 1307명까지 줄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가면서 해안가 창고형 공장도 하나둘 문을 닫았고, 곳곳에 빈집이 생겨났다.

이런 가운데 최근 창고형 공장과 빈집 등을 활용한 수백개의 카페가 생기면서 영도가 ‘커피 섬’으로 거듭나고 있다. 단순히 건물을 철거해 다시 짓는 방식이 아니라 조선소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도시재생 방식으로 탈바꿈을 시도하고 있다.

영도에 있는 카페 모모스의 커피 드립. 위성욱 기자

영도에 있는 카페 모모스의 커피 드립. 위성욱 기자

가장 대표적인 게 봉래동 물양장에 지난해 12월과 2019년 들어선 ‘모모스’(MOMOS)와 ‘무명일기’다. 이들 카페는 조선소 관련 건물을 사들여 이곳에 ‘M’자 모양의 뼈대를 유지한 채 카페를 만든 게 특징이다. 특히 커피 전문가에게 부산 대표 카페로 손꼽히는 모모스는 내부가 생두를 가마니째 쌓아둔 창고, 생두를 분리해 보관하는 사일로(silo), 커피를 볶는 대형 로스터기 등을 투명 유리창 뒤에 위치시켜 외부에서 드립 커피가 나오기까지 공정을 직접 볼 수 있는 체험장 같은 장소다.

카페 대형 창을 통해 밖을 보면 대형 선박이나 녹슨 닻, 사슬 등이 눈에 들어온다. 김모(30·경기도 안양시)씨는 “이쁜 커피숍은 다른 곳에도 많은 데 영화세트장 같은 이국적인 풍경을 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은 이곳뿐인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영도구 봉래동과 대평동에서는 마약왕(2017년)과 범죄와의 전쟁(2011년) 등 영화가 촬영됐다.

부산 동래구 온천동에 본점이 있는 모모스는 산지 직거래를 통해 세계 유명 커피 원두를 구매하고 있다. 모모스 공동 대표 2명이 2·3·4월에는 파나마 등 중미, 7·8·9월에는 브라질 등 남미, 12월에는 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를 돌아다니며 품질 좋은 원두를 사들인다. 또 모모스에는 2019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과 2021년 월드컵테이스터스 챔피언십 우승자 2명도 근무하고 있어 부산의 대표적인 ‘커피 성지’로 불린다. 모모스는 지역 예술가들과 협업으로 로컬 문화를 알리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2019 월드 바리스타 우승자인 전주연 모모스 공동대표는 “영도는 해운대나 광안리와 달리 아름답기만 한 바다가 아니라 역사와 문화가 함께 숨 쉬고 있는 부산의 진짜 역동적인 바다”라며 “이곳에 카페를 열면 자연스럽게 커피와 함께 부산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영도에 분점을 낸 것”이라고 말했다.

이 외에도 영도구 동삼동 옛 수리조선소 자리에 배 모양의 피아크(P.ARK·9917㎡)라는 복합문화공간이 지난해 5월 들어섰다. 대평동에도 수리공업사를 개조한 ‘에세떼’라는 카페가 있는데 이들 모두 조선소 관련 건물에 들어섰다.

영도가 카페로 유명해진 건 부산의 산토리니 마을로 불리는 영선2동의 흰여울마을이 조명되면서다. 깎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 길 위에 이국적인 풍경을 가지고 있는 이 마을이 영화 ‘변호인’(2013년)과 ‘D.P’(2021년)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관광객이 몰려들었고 주택 등을 개조한 카페도 속속 들어섰다. 영도에는 도시 재생이 추진 중인 봉래동·대평동·흰여울마을·동삼동 등에 현재 230여개의 카페가 있다. 10여년 전에는 7~8개에 불과했다. 부산시도 커피산업 발전을 위해 모모스 커피가 있는 영도구 봉래동 물양장 인근 봉래나루로 600m 구간(부산대교 하부~대선조선)을 올해 안에 커피 특화 거리로 조성하기로 하고 이달 중 공사에 들어간다.

부산시 건축자산 연구원인 홍순연 박사(건축학)는 “부산은 수입 원두의 90% 이상이 부산항으로 들어오고 이 중 일부가 영도 물류창고 등에 보관돼 커피와 관련이 깊은 도시다”며 “특히 최근에는 자연경관이 아니라 산업이나 삶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곳으로 카페가 들어서는 트렌드가 변하고 있는데 이런 것과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 영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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