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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신뢰 감축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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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딱 두 단어다. 273 페이지에 달하는 긴 내용 중 ‘북미’ ‘최종 조립’ 두 단어가 우리 마음을 흔들었다. 8월 16일 시행에 들어간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전기차를 사면 세금을 깎아 준다. 한 대당 7500달러 (약 1000만원). 미국 전기차 평균가격 5만4000 달러의 7분의1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소비자들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런데 이 혜택은 ‘북미’에서 (사실상 미국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에만 적용된다. 우리 전기차는 모두 한국에서 만드니 해당사항이 없다. 최근 미국에서 호조세를 보이던 우리 전기차엔 큰 타격이다. 경쟁 업체엔 이 보다 호재가 없다.

당혹스럽다. 두 측면 때문이다. 먼저 바로 이런 이유로 미국에 공장을 짓기로 이미 약속하지 않았던가. 지난 5월 바이든 대통령 방한 시 현대차그룹은 105억달러 (14조원)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이에 따라 2025년까지 조지아 주에 전기차 공장을 짓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현재 공장이 없단 이유로 세금 감면 대상에서 빠지니 공장을 짓는 쪽에선 허탈할 수밖에 없다. 2025년이면 불과 3년이다. 감축된 건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신뢰다.

전기차, 양국 관계에 상당한 파장
이론적 논의 대신 현실적 대안을
투자신뢰 보호, 현지생산 조건 등
서로 체면 살릴 타협점 찾아야

그 다음 공급망 문제다. 지금 공급망 재편성이 첨예한 쟁점으로 다양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쉽게 말해 신뢰하는 국가들간 분업으로 상품을 생산하자는 것이다. ‘최저가’ 생산시대에서 ‘친구 그룹’ 생산시대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 시점에 ‘친구 그룹’ 고려없이 ‘나 혼자’ 만들 전기차만 우대하는 인플레이션법은 작금의 공급망 논의의 기본 전제를 흔든다.

당연히 우리 정부는 왜 우리차만 차별하냐며 WTO-FTA 위반을 언급하고 있다. WTO 제소도 흘러나온다. 허나 이 자체도 쉽지만은 않다. 분명 미국차만 혜택이 있고 한국차엔 없으니 차별적이다. 그런데 보조금을 자국민에게만 선별적으로 지급하는 건 차별 금지의 예외로 허용되어 있다. 캐나다산 전기차에 혜택을 준다는 차원에선 우리나라에 대한 차별은 따져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미 미국은 WTO에 대한 기대를 접은 지 오래다. 불만의 핵심에 분쟁해결절차가 있다. 자칫 지금 시점에선 득보다 실이 클 가능성이 있다. 결국 제소로 향하더라도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지금은 보다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다음과 같은 접근을 생각해 보자.

먼저 이 문제의 장기적 휘발성이다. 지금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 (IPEF) 협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단계다. 미국 주도의 이 협상에 우리나라도 여러 고민끝에 적극적 참여를 결정했다. 이 시점에 이런 민감한 문제가 불거진다면 국내로 논란을 끌고 올 수밖에 없다. ‘신뢰’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협상 참여 동력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다. IPEF 추진에 한국의 중요한 역할을 기대하는 미국 입장에서도 득이 될 게 없다. 이러한 부분을 설명해야 한다.

다음으로 교역보다는 투자의 관점에서 실마리를 찾자. 보다 덜 ‘대결적’인 까닭이다. 대규모 해외투자가 성공하려면 투자를 받는 나라의 협조가 필요하다. 오랜 기간 여러 단계의 정부 내 프로세스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특히 공장 건설 같은 현지 가동형 투자는 더욱 그러하다. 지금 우리 여러 기업들이 추진 중인 대미 투자도 마찬가지다. 그간 미 연방정부, 주정부가 환영과 협력을 약속한 건 이런 이유다.

인플레이션법은 정반대다. ‘공장 부재’를 이유로 페널티를 준다면 ‘공장 건설’이란 투자의 원래 목적 달성은 더욱 어렵다. 시장에서 밀려난 다음 공장을 세워봐야 이미 물 건너 갔다. 협력 대신 족쇄를 채우는 격이다. 약속한 투자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한 투자 유치국의 협력이란 관점에서 사안을 바라보도록 미국 측을 설득해야 한다. 가령 최소한 이 법 발효 전 미국 내 투자가 구체적으로 진행 중인 경우엔 투자 완료를 후속 조건으로 미 기업과 동일하게 대우할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이미 법이 발효됐다는 점이다. 이제 바꾸긴 쉽지 않다. 더구나 11월 미국 중간선거가 코앞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대안은 지금 테두리 내에서 미국 측도 수용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것이다. 이 법의 세금 감면 조건은 미국 내 ‘최종 조립(final assembly)’이다. 그런데 ‘최종 조립’의 의미가 다소 애매하다. “모든 부품이 장착되어 운행 가능 상태로 딜러에게 전달되는 단계”로 규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2025년 공장 건설 이전까지 대부분의 최종 공정은 한국에서 거치더라도 마지막 일부 절차를 미국에서 진행하는 방식을 고려해 봄 직하다. 최종 조립 요건을 맞출 수도 있다. 이를 위해 공장 일부를 조기 완공, 조기 가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엔 탄력적인 적용을 위한 미국 측의 이해가 전제돼야 한다. 법을 손대지 않고 그나마 부작용을 줄이는 대안 중 하나다.

이 문제는 단지 전기차, 배터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반도체 등 다른 품목에도 유사한 조치가 뒤따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차제에 철저한 대응이 필요하다. 우리 기업들의 대미 투자엔 정당한 신뢰 보호가 생명이다. 어려운 여건, 힘든 결정으로 추진된 투자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