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이재명 대표 취임 일성 독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김형구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형구 정치에디터

김형구 정치에디터

이재명 신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문재인 전 대통령을 예방했다. 대표 취임 첫날인 29일 첫 외부 일정으로 경남 양산 평산마을에 머물고 있는 문 전 대통령을 찾은 거다. 통합의 메시지를 내려는 행보라고 한다.

이 대표와 문 전 대통령이 나란히 찍힌 사진과 영상을 보니 윤석열 대통령의 ‘경호 강화’ 지시 이후 시위대 욕설 대신 매미소리가 돌아왔다는 평산마을의 고즈넉한 정취도 덤으로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의 투샷 사진은 역설적으로 친문(친문재인)에서 친명(친이재명)으로 당 주류가 전면적으로 바뀐 ‘문·명 교체’를 상징하는 장면처럼 보이기도 했다.

대표 당선후 ‘협력’ ‘투쟁’ 함께 거론
이재명계, ‘여야 중진협의체’ 걷어차
대결의 길로만 가면 정치 복원 요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28일 열린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된 뒤 수락 연설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28일 열린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된 뒤 수락 연설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8·28 전대는 결과적으로 ‘이재명 당수 무혈입성’ 으로 요약된다. 경쟁 주자와의 피 튀기는 내전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정치적 타격이 거의 없었다. ‘이재명 방탄용’이란 논란을 부른 당헌 개정안은 중앙위원회 부결 사태 등 곡절은 있었지만 결국 이 대표를 따르는 강경파 뜻대로 재상정돼 통과됐다. 대선과 지방선거 패배 책임론이라는 굴레, 이 대표를 향해 옥죄어 들어오는 사법 리스크도 그의 독주를 막아세우진 못했다.

이변 없이 당권을 거머쥔 이 대표의 당선 직후 일성은 뜻밖에 양면적이다. 협치와 투쟁을 동시에 이야기했다. 우선 영수 회담을 제안하며 국정 협력 의지를 드러냈다. 윤석열 정부가 바른길을 간다면 두 팔 걷어 돕겠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선명 야당 노선도 분명히 했다. 민주주의와 평화 가치의 훼손, 퇴행과 독주에는 맞서 싸우겠다고 했다. 앞으로 민주당이 그려나갈 정국은 둘 중 어떤 모습에 가까울까. 새롭게 짜인 당 지도부, 강경파 일색인 면면 하나하나를 보면 전자보다는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지난 22일 민주당에서 벌어진 일이 이재명의 민주당 색깔에 대한 예감이 강한 확신으로 굳어지는 계기가 됐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윤 대통령을 만나 논의한 여야 중진협의체 제안에 친명계 최고위원 후보들이 집단 반기를 든 날이다. 여야 중진협의체는 정국이 극단적으로 경색될 때 풀어가는 열쇠의 하나로 김 의장이 제안한 구상이다. 이를 두고 강성 최고위원 후보들과 친명 의원들이 일제히 낸 반응은 과격했다. “노욕”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라) 등 수위 높은 표현들이 동원됐다. 민주당에서 국회의장 후보로 선출되자 “내 몸엔 민주당의 피가 흐른다”고 해 중립성 시비를 낳은 자당 출신 김 의장을 향해 던진 말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여야는 과거 극한 대립으로 길을 잃을 때면 다선 의원이나 원로들이 해법을 내 돌파구를 마련하곤 했다. 2013년 말 당시 5선 이상 새누리당 의원 8명과 민주당 의원 5명 등 13명이 모여 ‘여야 중진협의체’라는 이름의 기구를 발족시킨 일도 있다. 이번에 김 의장이 제안한 중진협의체의 원형이다.

물론 옥상옥 논란과 실효적 구속력 등의 한계가 지적되면서 유야무야 됐지만, 유의미한 성과를 낸 것도 꽤 있다. 초기의 중진협의체는 통일헌법 등을 논의할 초당적 공식 기구 설치를 합의했고, 2016년 국정농단 사태 때 여야 중진들이 한 테이블에 모여 ‘질서 있는 퇴진’을 타협안으로 내놓는 등 원숙한 경륜이 발휘된 적도 있다. 정국이 공전하며 거친 파열음을 낼 때 일종의 윤활유 역할을 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최근 여야 중진협의체가 논의된 윤 대통령과 김 의장의 만찬에 정의당이 “늦었지만 다행이다. 대화를 복원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이은주 비상대책위원장)고 했던 것도 그래서 아니겠나. 민주당 친명계 강경파들이 김 의장에게 “정계은퇴 준비나 하시라”며 악담을 퍼붓고 “어대명(어차피 당 대표는 이재명) 극복 위한 꼼수”라고 폄훼할 일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민주당에서 만시지탄이라는 얘기가 나왔지만 욕설과 소음에 고통받던, 문 전 대통령이 사는 양산마을에 매미소리를 돌려준 것도 의정 경력 20년(5선)의 국회의장이 윤 대통령에게 편 설득이 통했기 때문이란 걸 겸허하게 받아들였으면 한다. 그 전에는 민주당 초선 모임인 처럼회 등을 비롯해 목소리 큰 의원들이 양산에 내려가 여러 차례 ‘경호 강화’를 외쳤음에도 풀어내지 못한 일 아니었나.

이재명의 민주당 지도부가 여야 중진협의체를 비롯한 협치 어젠다를 그저 ‘이재명호’의 걸림돌 정도로 치부하고 대결의 길을 택한다면, 정치의 복원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 대표가 민주당 재집권의 토대를 닦는 길을 가려 한다면, 29일 첫 지도부 회의에서 한 “민생 앞에 여야와 정쟁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뚝심 있게 실천에 옮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