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구 정치에디터
이재명 신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문재인 전 대통령을 예방했다. 대표 취임 첫날인 29일 첫 외부 일정으로 경남 양산 평산마을에 머물고 있는 문 전 대통령을 찾은 거다. 통합의 메시지를 내려는 행보라고 한다.
이 대표와 문 전 대통령이 나란히 찍힌 사진과 영상을 보니 윤석열 대통령의 ‘경호 강화’ 지시 이후 시위대 욕설 대신 매미소리가 돌아왔다는 평산마을의 고즈넉한 정취도 덤으로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의 투샷 사진은 역설적으로 친문(친문재인)에서 친명(친이재명)으로 당 주류가 전면적으로 바뀐 ‘문·명 교체’를 상징하는 장면처럼 보이기도 했다.
대표 당선후 ‘협력’ ‘투쟁’ 함께 거론
이재명계, ‘여야 중진협의체’ 걷어차
대결의 길로만 가면 정치 복원 요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28일 열린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된 뒤 수락 연설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8/30/934b4961-62f1-4d10-84e8-716ae60459c8.jpg)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28일 열린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된 뒤 수락 연설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8·28 전대는 결과적으로 ‘이재명 당수 무혈입성’ 으로 요약된다. 경쟁 주자와의 피 튀기는 내전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정치적 타격이 거의 없었다. ‘이재명 방탄용’이란 논란을 부른 당헌 개정안은 중앙위원회 부결 사태 등 곡절은 있었지만 결국 이 대표를 따르는 강경파 뜻대로 재상정돼 통과됐다. 대선과 지방선거 패배 책임론이라는 굴레, 이 대표를 향해 옥죄어 들어오는 사법 리스크도 그의 독주를 막아세우진 못했다.
이변 없이 당권을 거머쥔 이 대표의 당선 직후 일성은 뜻밖에 양면적이다. 협치와 투쟁을 동시에 이야기했다. 우선 영수 회담을 제안하며 국정 협력 의지를 드러냈다. 윤석열 정부가 바른길을 간다면 두 팔 걷어 돕겠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선명 야당 노선도 분명히 했다. 민주주의와 평화 가치의 훼손, 퇴행과 독주에는 맞서 싸우겠다고 했다. 앞으로 민주당이 그려나갈 정국은 둘 중 어떤 모습에 가까울까. 새롭게 짜인 당 지도부, 강경파 일색인 면면 하나하나를 보면 전자보다는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지난 22일 민주당에서 벌어진 일이 이재명의 민주당 색깔에 대한 예감이 강한 확신으로 굳어지는 계기가 됐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윤 대통령을 만나 논의한 여야 중진협의체 제안에 친명계 최고위원 후보들이 집단 반기를 든 날이다. 여야 중진협의체는 정국이 극단적으로 경색될 때 풀어가는 열쇠의 하나로 김 의장이 제안한 구상이다. 이를 두고 강성 최고위원 후보들과 친명 의원들이 일제히 낸 반응은 과격했다. “노욕”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라) 등 수위 높은 표현들이 동원됐다. 민주당에서 국회의장 후보로 선출되자 “내 몸엔 민주당의 피가 흐른다”고 해 중립성 시비를 낳은 자당 출신 김 의장을 향해 던진 말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여야는 과거 극한 대립으로 길을 잃을 때면 다선 의원이나 원로들이 해법을 내 돌파구를 마련하곤 했다. 2013년 말 당시 5선 이상 새누리당 의원 8명과 민주당 의원 5명 등 13명이 모여 ‘여야 중진협의체’라는 이름의 기구를 발족시킨 일도 있다. 이번에 김 의장이 제안한 중진협의체의 원형이다.
물론 옥상옥 논란과 실효적 구속력 등의 한계가 지적되면서 유야무야 됐지만, 유의미한 성과를 낸 것도 꽤 있다. 초기의 중진협의체는 통일헌법 등을 논의할 초당적 공식 기구 설치를 합의했고, 2016년 국정농단 사태 때 여야 중진들이 한 테이블에 모여 ‘질서 있는 퇴진’을 타협안으로 내놓는 등 원숙한 경륜이 발휘된 적도 있다. 정국이 공전하며 거친 파열음을 낼 때 일종의 윤활유 역할을 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최근 여야 중진협의체가 논의된 윤 대통령과 김 의장의 만찬에 정의당이 “늦었지만 다행이다. 대화를 복원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이은주 비상대책위원장)고 했던 것도 그래서 아니겠나. 민주당 친명계 강경파들이 김 의장에게 “정계은퇴 준비나 하시라”며 악담을 퍼붓고 “어대명(어차피 당 대표는 이재명) 극복 위한 꼼수”라고 폄훼할 일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민주당에서 만시지탄이라는 얘기가 나왔지만 욕설과 소음에 고통받던, 문 전 대통령이 사는 양산마을에 매미소리를 돌려준 것도 의정 경력 20년(5선)의 국회의장이 윤 대통령에게 편 설득이 통했기 때문이란 걸 겸허하게 받아들였으면 한다. 그 전에는 민주당 초선 모임인 처럼회 등을 비롯해 목소리 큰 의원들이 양산에 내려가 여러 차례 ‘경호 강화’를 외쳤음에도 풀어내지 못한 일 아니었나.
이재명의 민주당 지도부가 여야 중진협의체를 비롯한 협치 어젠다를 그저 ‘이재명호’의 걸림돌 정도로 치부하고 대결의 길을 택한다면, 정치의 복원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 대표가 민주당 재집권의 토대를 닦는 길을 가려 한다면, 29일 첫 지도부 회의에서 한 “민생 앞에 여야와 정쟁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뚝심 있게 실천에 옮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