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어느 병원의 그럴듯한 1인실…그런 죽음 위해 정신 팔지 마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시길.”

29일 오전 제76회 후기 학위수여식이 열린 서울대 관악캠퍼스. 축사를 위해 단상에 오른 허준이(39)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 겸 한국고등과학원 석좌교수가 졸업생들에게 당부한 건 도전도 꿈도 아닌 친절이었다. 그는 “(앞으로)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다”면서 “마음을 단단히 먹길 바란다. 무례와 혐오, 경쟁과 분열, 비교와 나태,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서울대 물리천문학부를 졸업하고 수리과학부에서 석사 학위를 딴 그는 2007년 학부 졸업 당시 “겁이 나서, 아니면 충실하게 지내지 못한 대학생활이 부끄러워 졸업식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허 교수는 “제 대학 생활은 잘 포장해서 이야기해도 길 잃음의 연속이었다. 똑똑하면서 건강하고 성실하기까지 한 주위의 수많은 친구를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은 뭘 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며 “(여러분도) 정도의 차이와 방향의 다름이 있을지언정 지난 몇 년간 본질적으로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고 했다.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 겸 한국고등과학원 석좌교수가 29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제76회 후기 학위수여식에서 졸업생들에게 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 겸 한국고등과학원 석좌교수가 29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제76회 후기 학위수여식에서 졸업생들에게 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와 같은 말들에 대해선 “좋은 조언이고 사회의 입장에선 특히나 유용한 말이지만, 개인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며 경계하라고 당부했다. “(이들 중) 일부만 예외적으로 성공할 것”이라면서다. 허 교수는 일반적인 졸업 축사에 대해서도 “우연과 의지와 기질이 기막히게 정렬돼 크게 성공한 사람의 교묘한 자기 자랑을 듣고 말 확률이 있다”며 “학위 수여식에 참석할 때 감수해야 할 위험 중 하나”라고 꼬집기도 했다.

허 교수는 그러면서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승진, 은퇴, 노후 준비와 어느 병원의 그럴듯한 1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길 바란다”며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반갑게 맞이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수학계의 노벨상’ 필즈상을 받은 허 교수는 ‘조합 대수기하학’ 기반 연구를 통해 수학자들이 제시했던 여러 난제를 해결해 수학계에서 화제가 돼 왔다. 서울대는 이날 허 교수를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으로 선정하고 선정증서를 수여했다.

이날 학위수여식은 3년 만에 대면으로 치러졌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