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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정책'의 역설...예대차 공시에 금융취약층 제도권 밖으로

중앙일보

입력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

이 서양 속담은 좋은 의도에서 출발한 정책이 예기치 못한 나쁜 결과를 초래했을 때 종종 쓰인다. 금리 인상기를 맞아 정부와 정치권이 금리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앞다퉈 펼치는 정책이 시장을 왜곡해 대출 취약계층을 제도권 밖으로 몰아낼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착한 정책의 역설'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논란의 중심에 선 건 지난 22일 시행된 예대금리차 공시제도다. 이 제도의 핵심은 예금금리와 대출금리의 차이를 매달 공개해 대출금리 인하 등 ‘자율 경쟁’을 촉진하는 것이다. 약발은 바로 나타났다. 예대금리차가 큰 것으로 나타났던 신한은행과 전북은행, 토스뱅크는 해명 자료를 내느라 분주했다.

이 은행들의 공통점은 다른 은행보다 금융 취약계층에 대출 지원을 많이 한 것이다. 신한은행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9751억원의 서민 대출을 취급했다. 5대 시중은행 중 가장 많다. 전북은행은 외국인 대상 신용대출을 업권 최초로 시행했다. 토스뱅크는 대출 고객 중 중·저신용자 비율이 약 38%로(7월 말 기준) 모든 은행 중 가장 높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예대금리차 줄 세우기'가 취약계층에 대한 대출 약화라는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 금융업계 관계자는 "(대출 금리) 평균을 내리는 방법은 고금리 서민대출 상품 같은 정책 상품을 줄이는 것"이라며 “저신용 차주에 대한 비대면 신청을 대면으로 바꾼다거나, 한도를 줄이는 등의 소극적 영업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금융 당국은 “신용점수별 예대금리차와 평균 신용점수를 함께 발표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업권에서는 “일반인의 관심은 평균 가계대출 예대금리차"라며 "신용점수별 대출금리까지 들여다보는 고객은 없다”며 답답해하는 분위기다.

30일 시작되는 '금리인하청구권 수용률 공시'도 비슷한 문제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금융사는 이달부터 업권별 협회·중앙회 홈페이지에 금리인하요구 신청 건수와 수용 건수, 수용률, 이자 감면액 등 네 가지 항목을 6개월마다 공개해야 한다. 이번엔 '수용률 줄 세우기'가 이뤄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 금융사 관계자는 “금리 인하 청구권 수용률이 낮은 금융사는 기존에 신용정보를 더 많이 확보하고 평가를 더 정교하게 잘한 곳일 수도 있는 데, 공시 후 무조건 수용률이 낮으면 나쁜 금융사로 낙인 찍힐까 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최근 ‘국정감사 이슈 분석’ 보고서에서 “수용률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금융사가 오히려 신청 안내 등을 소극적으로 할 부작용도 감안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착한 정책의 역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법정 최고금리 인하다. 문재인 정부는 가계부채 위험을 해소하고 취약 계층의 이자 부담을 덜어주겠다며 법정 최고 금리(대부업, 시행령 기준)를 27.9%에서 지난해 7월 20%까지 낮췄다.

대출자의 신용도에 따라 산정해야 할 금리가 최고 20%로 제한돼 있다 보니 금융사에서는 이보다 더 높은 금리를 적용해야 할 신용도가 낮은 사람은 거절할 수밖에 없다. 한 2금융권 관계자는 “이미 저신용자들은 담보 없이는 초고금리 대출도 받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담보가 없는 진짜 취약차주들은 제도권 밖으로 이미 많이 내몰렸다”고 말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분석 결과, 법정 최고금리를 2%포인트 인하할 경우 2021년 말 기준 카드·캐피털·저축은행 신용대출을 받은 차주(대출자) 약 65만9000명이 비제도권 금융으로 밀려나게 된다. 법정 최고금리를 4%포인트 낮추면 약 108만4000명의 차주가 제도권 바깥으로 내몰린다. 법정 최고금리를 더 낮추면 저신용 서민의 자금줄이 끊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그럼에도 국회에서는 여야 불문하고 최고금리를 더 내려야 한다는 법안을 발의하고 있다.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8일 법정 최고금리를 12%로 낮추는 내용의 이자제한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김주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올 초 법률상 최고금리를 15%로 낮추자는 이자제한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전문가와 업계는 '착한 정책'이 취지에 맞게 제대로 작동하려면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 은행관계자는 “평균 예대금리차 공시의 경우 햇살론 등 저신용대출을 제외하고 통계를 산출하는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금리인하청구권 수용률 공시와 관련해서 한 카드업계 관계자는 “업계를 위축시키는 공시보다 비대면 신청과 안내를 적극적으로 금융사에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 등이 나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예대금리차와 금리인하요구권 수용률 공시는 모두 소비자의 알 권리 측면에서는 좋은 정책”이라면서도 “객관적인 정보 공개에 머물러야지 여기에 금융 당국이 가치를 부여하고 압박을 가한다면 시장 왜곡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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