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 전기차에 대당 최대 1000만원의 보조금을 끊어버린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항의하기 위한 정부 합동대표단이 29일 미국으로 떠났다. 뒤늦게 미 행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로비에 총력전을 벌이자는 건데 전망은 밝지 않다.

안성일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전략실장이 29일 오전 인천공항에서 미국으로 출국하는 모습. 연합뉴스.
정부 대표단 보냈지만…
이번 정부 대표단은 안성일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전략실장, 손웅기 기획재정부 통상현안대책반장, 이미연 외교부 양자경제외교국장 등으로 구성됐다. 2박 3일 동안 무역대표부, 재무부, 상무부, 의회 등 방문해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에 맞지 않고, 최근 한ㆍ미 동맹 기조에 역행한다"는 점을 강조할 계획이다.
이는 결국 "북미 지역(미국ㆍ캐나다ㆍ멕시코)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준다"고 못 박은 현행법을 "한국에서 생산된 현대ㆍ기아차에게는 유연하게 적용해달라"는 요구인데, 미국이 응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정부 당국자는 "11월 중간선거까지 바이든 행정부가 유연성을 발휘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말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 지지율에 '효자 노릇'을 한 법안을 민주당이 스스로 나서서 손 볼 가능성은 사실상 없는 상황에서, 정부와 업계는 중간선거 이후라도 미국이 시행령을 통해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완화할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있다. 전기차 보조금 지급 조항의 핵심이자 현대ㆍ기아차에 직격탄을 날린 '북미 지역 최종 조립' 요건에 예외를 두는 내용의 시행령을 추가로 제정해 한국산 전기차도 보조금 혜택 대상에 다시 포함하자는 구상이다.
현행법대로면 미국 현지에서 현대ㆍ기아차는 미국산 모델에 비해 대당 최대 1000만원씩 비싸게 팔리게 된다. 올해 상반기 기준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현대ㆍ기아차의 점유율은 9%로 테슬라(70%)에 이어 2위인데 앞으로 가격 경쟁력이 그만큼 떨어지게 된 셈이다.

박진 외교부 장관이 26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대니얼 크리튼브링크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와 면담하는 모습. 이 자리에서 박 장관은 "인플레이션 감축법 관련 한국의 심각한 우려를 전달하고, 한국 기업에 대한 차별적 대우는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와 세계무역기구(WTO) 위반 소지가 있어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러한 차별적 조치의 면제 또는 유보 등 가능한 해결 방안이 조속히 마련되도록 노력해 달라"고 말했다고 외교부가 이날 밝혔다. 외교부.
광물ㆍ부품 조건이라도 사수
또 정부와 업계는 '최종 조립' 조건 외에 '광물', '부품' 관련 조건은 미 재무부가 올해 연말까지 유연성을 발휘할 여지가 있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현재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에는 광물과 부품의 북미지역 및 미국과 FTA를 맺은 국가로부터의 최소 조달 비율이 연도별로 명시돼 있다. 정부 당국자는 "조달 비율은 이미 고정돼 있지만 여기에 해당되는 광물과 부품의 구체적인 품목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2025년까지 미국에서 새로 지어지는 배터리 공장 13개 중 11개가 한국 업체 소유라 "유예 기간을 넉넉하게 받으면적어도 2025년부터는 광물과 부품 관련 요건을 무난히 맞출 수 있을 것"이란 게 정부 판단이다.
WTO 규정 외에 FTA 규정 위반을 지적할 수 있다는 점도 공략 포인트 중 하나다. 정부 당국자는 "현재 인플레이션 감축법으로 타격을 받은 주요국 중 미국과 양자 FTA를 맺은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며 "FTA의 내국민 대우 규정 위반을 근거로 따질 수 있는 게 우리만의 무기라면 무기"라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6일 (현지시간) 미 워싱턴 백악관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하는 모습. AP. 연합뉴스.
전문가들 "예외 주긴 힘들 듯"
다만 중간선거 이후 바이든 행정부의 입지를 예단할 수 없는 데다 유럽연합, 일본 등 인플레이션 감축법으로 타격을 다른 국가와의 형평성 문제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명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전기차는 미국에서 전략적으로 밀고 있는 주력 산업인데다 미국 입장에서 한국 기업에게만 대놓고 면제를 주는 시행령을 추가로 만들기는 부담스러울 것"이라며 "정부와 업계는 미국 설득에 총력을 다하되 기대 수준을 현실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미국 측에서 역으로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전기차 보조금 관련 조항이 현대ㆍ기아 외 여타 한국 기업에는 우회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란 논리를 펼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한 외교 소식통은 "미국 내에선 인플레이션 감축법으로 인해 중국 배터리 기업의 북미 지역 투자가 위축되면서 반사 이익을 보는 한국 기업도 생길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 입법이 한국과 충분한 사전 상의 없이 초고속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향후 미국과 경제 안보 및 기술 동맹까지 약속한 윤석열 정부에 경종을 울렸다는 분석이다. 정부가 미국 주도의 인도ㆍ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와 반도체 협력체 '칩4' 등에 창립 멤버로 참여하며 개국 공신 역할을 충실히 했지만, 갈수록 선명해지는 미국의 자국 중심주의 경제 정책에 언제든 이른바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