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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하게, 잔잔하게, 부드럽게...자연인 듯, 사람의 마음인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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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배, '바비'가 온 정원', 2021, 캔버스에 아크릴, 194X520cm. [사진 학고재]

강요배, '바비'가 온 정원', 2021, 캔버스에 아크릴, 194X520cm. [사진 학고재]

강요배, 풍설매, 2022, 캔버스에 아크릴, 2022, 130x162cm. [사진 학고재]

강요배, 풍설매, 2022, 캔버스에 아크릴, 2022, 130x162cm. [사진 학고재]

강요배, 가을 풀섶, 2022, 캔버스에 아크릴, 162x130cm. [사진 학고재]

강요배, 가을 풀섶, 2022, 캔버스에 아크릴, 162x130cm. [사진 학고재]

'그림은 눈으로 보는 것'이란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강요배(70) 화백의 그림을 말할 땐 더욱 그렇다. 그의 캔버스에선 바람이 불어 나온다. 새벽 공기 속 잔잔한 바람도 있고, 미친 듯이 수풀을 할퀴고 휘젓는 매운바람도 있다. 계절과 시간에 따라 달라지고 살갗으로 느껴지는 바람 풍경, 마음을 두드리는 자연의 리듬이 그 안에 있다.

제주화가 강요배 전시 #학고재갤러리, '첫눈에' #서울서 4년만, 회화 18점 #"그림은 나를 찾는 과정"

26일 서울 삼청동 학고재갤러리에서 개막한 개인전 '첫눈에'서 그는 제주의 구름과 안개와 바람, 눈을 몰고 왔다. 흙과 풀, 꽃과 나무, 한라산도 함께 왔다. 지난해 대구미술관에서 제21회 이인성미술상 수상기념전을 연 그는 서울에서 4년 만에 여는 이번 전시에서 2018년부터 2022년까지 그린 회화 18점을 선보인다. 화폭엔 여전히 바람이 불지만, 그의 자연은 더 깊고, 여유로워졌다.

'첫눈에'라는 전시 제목은 작가가 직접 지었다. 그는 "(대상을 보았을 때) 첫 번째 오는 느낌이 먼저라는 뜻"이라며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구상과 추상 등 이론에 갇히지 않은 시각으로 보고 직관적으로 보고 느끼는 감정이 소중하다"고 말했다.

더 분방하게, 부드럽게···

1952년 제주에서 태어난 강 화백은 서울대 미대(학·석사)를 졸업하고 1981년 민중미술 동인 '현실과 발언'에 합류해 시대 현실을 드러내는 풍경을 그려왔다. 1992년 '제주민중항쟁사' 연작을 모아 전시를 연 뒤 고향인 제주로 돌아갔다. 2015년 이중섭미술상, 2020년 이인성 미술상을 받았다.

제주의 자연을 소재로 작업해오며 2년 전 첫 예술산문집 『풍경의 깊이』를 낸 그는 당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형태를 더 자유롭게 풀고 흐트러뜨리고 싶다"며 "리듬을 담아야 한다. 더 분방하게, 부드럽게 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이 말이 그가 자신에게 건 강력한 주문이었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지난해 대구미술관에서 먼저 선보인 ''바비'가 온 정원'(2021)은 2020년 10월 태풍 바비가 왔을 때 정원의 풍경을 담았다. 제목을 모른 채 마주하면 가로 5m 20cm, 세로 1m 94cm의 대형 화폭은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이 초록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로 보인다. 수풀을 격렬하게 후려치는 바람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붓 대신에 구긴 종이와 말린 칡뿌리, 빗자루의 솔기를 등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강 화백에게 바람은 생명력과 같은 의미다. 『풍경의 깊이』에서 그는 "강한 바람은 인고의 생명을 안아 키운다. 바람과 나무는 서로를 멸하지 않고 서로를 만든다. 어쩌면 그것들은 하나다"라고 썼다. 그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격렬한 생명의 기운 그 자체였음을 알게 되는 대목이다.

한라산 백록담을 소재로 한 '산상' 작품 앞에 선 강요배 화백. [사진 학고재]

한라산 백록담을 소재로 한 '산상' 작품 앞에 선 강요배 화백. [사진 학고재]

강요배, 비천, 2022, 캔버스에 아크릴, 227x182cm.[사진 학고재]

강요배, 비천, 2022, 캔버스에 아크릴, 227x182cm.[사진 학고재]

강요배, 장밋빛 하늘, 2021, 아크릴에 캔버스, 181.7x227.5cm. [사진 학고재]

강요배, 장밋빛 하늘, 2021, 아크릴에 캔버스, 181.7x227.5cm. [사진 학고재]

거센 눈바람 속에 핀 홍매를 담은 '풍설매(風雪梅)'(2022)도 마찬가지다. 붉은 매화와 흰 눈바람이 화면 안에서 팽팽하게 공존하는 풍경은 차갑고 우아하다. 그리고 파란 하늘에 자유롭게 흩날리는 구름을 그린 '비천(飛天)'(2022)에서 바람은 더 맑고 가벼워졌다. 김정복 평론가는 이 그림에 대해 "고구려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상서로운 기운의 문양처럼 기류의 스침이 날렵하다"고 썼다. 강 화백 자신도 이번에 스스로 가장 흡족한 작품으로 '비천'을 꼽았다. 붓을 움직이는 속도와 강약이 자유자재로 됐다는 뜻이다.

가로 길이 7m에 육박하는 또 다른 대형 회화 '산상(山上)'은 올해 완성됐다. 한라산 정상 풍경을 담은 것으로, 마치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듯한 백록담 형상이 운무와 함께 신비로워 보인다. 또 다른 대작인 '중향성(衆香城)'(2019)은 1998년 금강산에 방문했을 때 본 풍경을 겸재 정선이 그린 금강전도의 구도로 장엄하게 그렸다.

그가 그린 산은 눈앞의 산을 재현한 게 아니다. 그는 "붓을 들어 그리기 시작할 때 사진은 치워야 한다"며 "그 시공간에 대한 경험은 내 마음에 있다. 자연을 몸으로 체험하고 마음에 여과된 것이  화면에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평론가 이진명에 따르면, 강요배의 회화는 자신의 삶과 생각, 감정을 자연에 투영한 의경(意境)의 세계다. 이 평론가는 "강요배의 회화는 서양의 인상주의 화풍을 연상시키는 추상적 화면으로 나타나지만, 그 기저에 '사람과 자연이 본래 하나'라는 동양적 사고가 깊이 자리해 있다"고 설명했다.

온화한 색채와 붓질이 두드러지는 작품도 눈에 띈다. '장미의 아침놀'(2021)과 '장밋빛 하늘'(2021), '구름 속에'(2021) 등이다. 부드럽고 잔잔한 풍경에 자연에 대한 경이 어린 시선이 녹아 있다. '배나무꽃'(2022), 손바닥 선인장(2022), '설담' (2020)엔 세심하고 정감 어린 붓질이 도드라진다.

그는 "제주도에 살면 서울에선 상상도 못 한 풍경을 풍부하게 볼 수 있다"며 "자연을 관찰해보면 그 안에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이라 불리는 칠정(七情)이 다 담겼다. 격한 것, 잔잔한 것, 은은한 것, 대비가 강렬한 것 등 사람 마음을 닮은 것이 다 있어 마음공부가 절로 된다"며 웃었다.

올해 일흔의 강 화백은 "내 그림이 핵심만을 드러내는 추상에 닿는 게 목표로 작업한다"고 했다.  이어 "아직도 나는 그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노(怒)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다 사람이 본래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위로를 받기도 한다"며 "그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전시는 9월 3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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