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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급식 끼니 때우던 '코피노' 창도씨…의사의 꿈 키워준 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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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감사합니다. 자랑스럽고 좋은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필리핀에서 명문대로 알려진 앙헬레스 의과대학에서 지난달 4년간의 학위 과정을 끝마친 이창도(30)씨가 26일 한 말이다. ‘창도’라는 한국 이름을 쓰지만 이씨는 한국인 아버지와 필리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코피노(Kopino)’다. 지난 1일부터 병원 인턴십을 시작한 이씨는 중앙일보와 줌(Zoom) 인터뷰에서 “긴 과정이었고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최선을 다했다”며 “받은 감사함을 다시 되돌려주고 싶다. 가정의학과 의사가 되어 가난하고 힘든 환경에서 생활하는 코피노 아동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26일 필리핀 앙헬레스대학교 졸업식에 참여한 이창도(30)씨의 모습. 동방사회복지회 제공

지난 26일 필리핀 앙헬레스대학교 졸업식에 참여한 이창도(30)씨의 모습. 동방사회복지회 제공

가난 딛고 우뚝 섰다…코피노 의대생의 ‘꿈’

메디컬닥터 수료를 앞두고 졸업앨범 사진을 찍는 이창도씨의 모습. 동방사회복지회 제공

메디컬닥터 수료를 앞두고 졸업앨범 사진을 찍는 이창도씨의 모습. 동방사회복지회 제공

이씨의 유년 시절은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4살까지 같이 살았던 한국인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 후 소식이 끊겼고, 나중에야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어머니 혼자 생계를 꾸려가는 동안 두 명의 어린 동생들과 무료 급식으로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어려운 형편에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이씨는 2011년 우수한 성적으로 앙헬레스 대학 의료기초 학사과정에 입학한다. 그러나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이씨 어머니가 실직한 이후 살던 집에서 가족들이 쫓겨나게 된 것이다. 학업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이씨의 운명이 바뀌게 된 건 2013년 동방사회복지회를 만나게 되면서부터다. 현지에서 코피노와 빈민 아동 지원사업을 하던 동방사회복지회 측에 무료급식을 먹으러 오던 ‘창도’라는 이름의 학생이 눈에 띈 것이다. 이씨는 동방사회복지회의 장학금 지원을 받으며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이씨는 “사람을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 23살 때 진로를 의사로 굳혔다”며 “새벽 3~4시에도 일어나서 공부했다”고 말했다. 앙헬레스 동방아동센터 건물 내에서 주거 지원도 약속받았다. 이씨가 같은 해 앙헬레스대 의료기초 학사과정에 재입학해 4년간에 걸친 대학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이유다. 장정희 김해 조은금강병원 정신건강의학과장이 이씨의 대학교 전 과정 등록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이씨의 고민은 남아 있었다. 앙헬레스 의대 대학원 시험에 통과했지만, 비싼 대학원 학비가 문제였다. 때마침 제약회사에서 취업 제의가 들어왔다. ‘의사’의 꿈을 포기해야하나 망설였지만 다행히 동방사회복지회 측의 계속된 장학금 지원으로 학비 걱정을 덜 수 있었다. 2018년부터 4년간 메디컬 닥터 학위 과정을 이수하고 지난 1일부터 병원에서 인턴십을 시작한 이씨는 “신세계”라며 “학교에선 공부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는데, 환자를 직접 대하니 확실히 다르다는 걸 크게 느꼈다”고 말했다. 앞으로 1년간의 인턴십 과정을 마쳐야 이씨는 전공의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얻게 된다.

“어려운 코피노 아동 돕고 싶다”

26일 필리핀 앙헬레스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이창도(왼쪽)씨. 동방사회복지회의 필리핀 현지직원 조이(가운데), 어머니(오른쪽)이다. 동방사회복지회 제공

26일 필리핀 앙헬레스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이창도(왼쪽)씨. 동방사회복지회의 필리핀 현지직원 조이(가운데), 어머니(오른쪽)이다. 동방사회복지회 제공

이씨는 의대 재학 중에도 틈날 때마다 앙헬레스 동방아동센터 방과 후 교실에 나와 코피노 아동들의 공부를 도왔다. 그는 “제가 어렸을 때 집이 되어주고 또 부모님이 되어 제 학비를 비롯해 가족을 지원해준 곳이 동방아동센터”라며 “코피노 아이들의 능력을 키워주고 한국인 아버지가 해주지 못하는 일을 대신 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가 의사의 꿈을 키웠던 앙헬레스 동방아동센터는 2013년 이씨를 포함한 58명의 코피노 아동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다. 2019년엔 135명까지 늘어났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통행제한 조처가 내려지면서 현재는 92명으로 줄어들었다. 동방아동센터에서 장학금을 지원받아 의대에 진학한 코피노는 이씨가 처음이다. 이곳에서 9년째 근무 중인 조이(Joy)는 “어릴 때부터 봐온 이씨가 목표에 도달한 걸 보니 굉장한 기쁨과 감동을 느꼈다. 필리핀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아이들이 많은데 교육 사업을 계속 진행해줬으면 좋겠다. 정말 감사하다”고 했다.

공식통계 없는 ‘코피노’ 4만명 추정

동방사회복지회는 필리핀 앙헬레스동방아동센터 방과후 교실을 통해 코피노 아동들에게 한글교육과 태권도교육 등 한국전통문화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동방사회복지회 제공

동방사회복지회는 필리핀 앙헬레스동방아동센터 방과후 교실을 통해 코피노 아동들에게 한글교육과 태권도교육 등 한국전통문화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동방사회복지회 제공

 현재 필리핀 내 코피노 통계는 공식적으로 집계되지 않았으나 현지에선 약 4만명 정도로 추정한다고 한다. 필리핀은 출생 신고 시 정부에 수수료를 지불해야 해서 빈민층에서 신고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인구 통계가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코피노 아동들은 경제적 어려움과 차별을 겪곤 한다. 한국인 아버지가 한국으로 떠난 뒤 연락을 끊고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다.

 올해로 설립 50주년을 맞은 동방사회복지회는 필리핀뿐만 아니라 스리랑카와 캄보디아 등에서도 현지 아동들에 대한 지원 사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김진숙 동방사회복지회 회장은 “이씨가 꿈을 잃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빈민 마을 지역사회와 특히 필리핀·한국 혼혈인에게도 큰 귀감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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