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우리는 달린다, 고로 존재한다] 암 치료 후유증 이기고, 달리기 책 쓰고, 뷰티 모델 되고…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803호 10면

SPECIAL REPORT

달리기란 한계를 넘는 행위다. 죽도록 고통스런 한계를 잘 넘기고 나면 다른 사람으로 거듭난 듯 편하게 뛸 수 있다. 그래서일까. 때론 누군가의 삶을 바꾸기도 한다. 꾸준히 달렸을 뿐인데 질병을 극복하기도 하고, 중년에 뷰티 인플루언서가 되기도 한다. 달리기를 소재로 책을 써 저자가 되거나, 달리기를 전파하는 직업 유튜버가 된 사람도 있다. 달리기로 삶을 바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암환자? 하프 마라톤까지 완주

의사 윤상호씨는 암을 극복하고 올해 처음 하프 마라톤을 완주했다. [사진 윤상호]

의사 윤상호씨는 암을 극복하고 올해 처음 하프 마라톤을 완주했다. [사진 윤상호]

외과의사 윤상호(50)씨는 9년전 신장암 진단을 받았다. 5년간 수술과 약물치료를 받고 나니 운동 부족으로 살이 찌고 체력은 바닥이 났다. 야심차게 등산을 가도 산에 오를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같이 걷자”고 나섰다. 충암고 동문 4명이 매주 일요일 새벽 옥수역에서 만나 남산을 걸었다. 어느날 친구들이 “뛰어보자”고 했다. 1km만 따라 뛰어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몸살이 났지만, 친구들을 보려고 매주 꾸준히 나가다 보니 어느새 3km, 5km를 쉽게 뛰게 됐다. 올해는 처음으로 하프 마라톤에 도전해 완주의 기쁨도 맛봤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 에세이를 보면서 조금씩 따라했던 것 같아요. 달리기를 과도하게 맹신한 건 아닌데, 숨차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뛰다 보니 조금씩 욕심이 생기더군요. 힘들 땐 달리기를 멈춰야 하는 9999가지 이유가 생각나면서 괴롭기도 했지만, 꾸준히 하는 사이 저도 모르게 점점 잘 뛰게 됐어요. 초기엔 네 친구 중 당연히 꼴찌였지만, 지금은 3, 4위를 다투고 있습니다.(웃음)”

관련기사

달리기 시작한 지 5년째. 전에 비해 체중도 많이 줄었고, 체력도 50대 또래들보다 나은 편이니 병으로 인한 불편은 극복한 셈이다. 이제 몸을 위한다기 보다 습관이 돼서 뛴다. “정상인들도 50대 들어서면 체력을 유지하기 힘들거든요. 제가 해보니 달리기는 시간 대비 운동량 가성비가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무엇보다 생활에 활력소가 생겨서 좋습니다. 제가 풀코스를 뛰지는 못하지만, 마라톤 하는 사람들에게 ‘러너스 하이(숨이 턱에 차고 고통스러워 그만 두고 싶을 때쯤 느껴지는 쾌감)’란 게 있거든요. 힘들게 뛰다가도 어느 순간 평온한 상태가 찾아오는데, 그걸 잊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 맛에 중독되서 자꾸 뛰게 됩니다.”

#스테디셀러 저자가 되다

직장인 박태외씨는 즐겁게 달리는 노하우를 전파하는 책을 썼다. [사진 박태외]

직장인 박태외씨는 즐겁게 달리는 노하우를 전파하는 책을 썼다. [사진 박태외]

직장인 박태외(44)씨는 초중학생 시절 6년간 육상선수였지만, 십여년전 까지 달리기와 담을 쌓고 지냈다. 달리기가 너무 힘들었던 기억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달리기는 제가 하루키보다 낫습니다』라는 책을 냈고, 지금은  10월 코로나 이후 처음 열리는 JTBC 마라톤에서 2시간 57분 개인 기록 경신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 내후년 보스톤 마라톤 출전이 장기 목표다.

그가 30대에 다시 뛰기 시작한 건 몸의 이상 때문이었다. 둘째가 태어나면서 취미로 하던 야구를 그만두자 체중이 급격히 증가하더니,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증상까지 나타났다. “분명 머리로는 두발자국 걸어갔는데 실제 내 몸은 멈춰있는 거예요. 이건 안되겠다 싶었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힘들게 살았던 경험이 있거든요.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셔서 ‘단명’에 대한 잠재적인 공포가 있었는데, 이러다가 나까지 건강에 발목 잡힐 것 같더군요. 가장으로서 주어진 명은 살고 싶다는 생각이 컸어요.”

집근처 중랑천을 뛰기 시작했지만 수월하진 않았다. 선수 경력에 대한 자신감 때문에 욕심을 부리다 부상을 입기 일쑤였다. 동호회에 가입해 사람들과 함께 뛰면서 욕심을 버리니 건강하게 뛸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큰 수확은 달리기를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을 극복한 것. 두번째 러너 인생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달리기의 진화’에 대한 깨달음 때문이다. ‘달리기를 위한 달리기’가 아니라 누군가와 같이 뛰면서 여행, 소풍, 우정, 대회 등의 다른 목표와 결합하면 저절로 뛰게 된다는 것이다.

전자책 포함 5000부 이상 팔리며 스테디셀러가 된 『달리기는…』도 누구나 쉽게 시작하지만 그만큼 쉽게 그만두는 ‘러닝’을 멈추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썼다. 그만두는 마음을 잘 알아서다. “혼자 열심히 헉헉대며 뛰다가 마는 게 달리기라고 생각하니까 그만두게 되죠. 일단 같이 뛰면 달리기는 저절로 하게 되고, 친구들과 카페에서 대화하는 것과 똑같아요. 여행을 가서 한 시간만 뛰면 한 도시를 다 돌아볼 수 있고, 또 대회를 나가려면 준비를 위해 뛰게 됩니다. 달리기 자체는 고독하고 힘든 운동이지만 이렇게 진화시키면 쉽게 이어갈 수 있습니다.”

#뷰티 인플루언서로 자신감 회복

국립발레단 홍보팀장 김현아씨는 달리기로 살을 빼고 뷰티 인플루언서가 되어 잡지 화보를 찍었다. [사진 김현아]

국립발레단 홍보팀장 김현아씨는 달리기로 살을 빼고 뷰티 인플루언서가 되어 잡지 화보를 찍었다. [사진 김현아]

국립발레단 홍보팀장 김현아(45)씨는 한동안 거울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무용 전공자로 ‘여자로서의 외모’를 중시하며 살아왔는데, 마흔을 넘기자 슬금슬금 살이 찌더니 코로나 이후엔  만나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보탰다. “전신 거울에 가녀린 발레리나들과 함께 비칠 땐 내가 괴물같아 보여 우울증에 걸릴 뻔 했다”고 털어놓았다.

애써 현실을 외면하고 살던 지난해 7월, 해마다 받는 건강검진 결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콜레스테롤을 비롯한 온갖 수치가 정상 범위를 넘어선 것. “이러다 죽겠다 싶더라구요. 지금 바로잡아 놓지 않으면 영원히 망가질 것 같았어요.”

곧바로 집근처 탄천을 매일 새벽 6km씩 뛰기 시작했다. ‘저탄고단’ 식이요법을 병행하며 6개월 만에 10kg 감량에 성공했다. 몸이 가벼워지자 더 뛰고 싶어져 요즘은 8~12km를 주 3회 이상 뛰고, 테니스까지 병행하고 있다. 최근 받은 건강검진 결과는 드라마틱했다. 지난해 최악을 찍었던 수치들이 싹 다 정상을 되찾았고, 만성 소화불량까지 치유됐다.

건강회복 보다 만족스러운 건 자신감 회복이다. 최근 화장품 브랜드 인플루언서가 된 것도 달리기의 성과다. 한 화장품 회사가 물색한 의사, 변호사 등 다양한 직업의 여성 8인 중 홍보업계를 대표하는 얼굴로 뽑혀 매거진 촬영도 해보고, 공식 SNS 활동도 하게 됐다. “건강을 위해 뛰었을 뿐인데 달라진 게 많네요. 예뻐졌다는 소리를 듣고, 예쁜 옷을 입을 수 있다는 게 저한테 중요해요. 발레리나들과 같이 거울에 비쳐도 이젠 자신 있습니다.(웃음)”

#1등 달리기 채널로 행복 전파

달리기 유튜버 올레는 최근 구독자들과 함께 1000일 연속 달리기 기념 행사를 열었다. [사진 올레]

달리기 유튜버 올레는 최근 구독자들과 함께 1000일 연속 달리기 기념 행사를 열었다. [사진 올레]

지난달 30일 전국의 구독자와 1000일 연속 달리기 기념행사를 열었던 유튜버 올레(본명 이재진·46)는 “달리기가 삶의 전부”라고 단언 한다. 10년 전까진 제대로 달려본 적도 없고, 달리기로 자아실현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다. 지금은 매일 10km가까이 뛰고 있고, 구독자 8만명에 팬클럽 6000명을 거느린 독보적인 달리기 채널 ‘마라닉 TV’ 운영이 아예 직업이 됐다.

시작은 위경련으로 몇 달 새 응급실에 3번 실려갈 만큼 스트레스가 심했던 회사생활이었다. “몸이 망가진 상태에서 변화가 필요할 때 달려 보라고 권유를 받았어요. 첫날은 너무 힘들고 달리는 게 어색했는데, 뭔지 모를 뿌듯함은 있더군요. 일주일을 뛰니 성취감이, 한달을 뛰니 자신감이 생기면서 재미가 붙었고, 두어달 꾸준히 뛰니 10km는 쉽게 달릴 정도로 체력이 회복됐죠. 그때부터 완전히 빠져들었고, 매일 달리기에 도전한 지 오늘로 1020일째입니다.”

그의 직업은 방송사 PD였다. 어린 시절부터 영향력 있는 콘텐트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싶어 PD가 됐지만, 현실은 달랐다. 회사가 시키는 일만 하는 삶에 염증이 생겼지만, 대기업을 박차고 나올 순 없어 스트레스만 쌓여갔다. ‘박차고 나올 용기’를 준 게 달리기였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큰 사람인데 회사에서 부족함을 느끼니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자존감이 낮았어요. 그런데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해 완주하고 나니 뭔들 못할까 싶더군요.”

모든 걸 내려놓고 개인 크리에이터가 됐고, 달리기와 직업을 결합하면서 ‘내가 나로 살아가고 있다’는 충실감을 얻었다. 달리기 채널은 더러 있지만, ‘마라닉TV’는 “정말 안 달리는 분들을 달리게 한다”는 차별성 덕에 호응이 높다. “매일 아침 댓글을 확인하면서 하루를 시작해요. 제 채널을 보고 달리기를 시작했고, 고맙다는 댓글이 쇄도하는 걸 보면서 제가 꿈꿨던 제작자로서의 방향이 이제야 맞은 느낌입니다.”

달리기라는 한정된 소재에도 채널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뚜렷하다. 사람을 모으는 달리기의 마력 때문이다. “콘텐트는 무궁무진해요. 이제 유명인도 찾아오고 행사도 몰려오고, 전국구 오프라인 모임이 있으니 어디를 가도 구독자들과 달릴 수 있거든요. 달리기는 소재일 뿐, 제가 회사를 그만둔 과정이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채널이 되니 편하게 접근하고 공감해주시는 분들이 많죠. 달리기는 내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고, 내 전부가 됐어요. 필요에 의해 달리기 시작했지만 좋은 걸 알리고 싶어 유튜브를 열었고, 그게 행복으로 돌아왔으니 행복을 전파하는 ‘해피러너 올레’로 죽을 때까지 뛰겠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