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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안중근, 하얼빈 그리고 코레아 후라(대한만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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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3호 31면

정여울 작가

정여울 작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일어난 절호의 일격이었다.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치밀한 작전, 조용하고 유순하며 저항이라고는 모를 거라 생각했던 조선인들의 가슴속에 품은 깊은 분노와 독립을 향한 열망이 터져 나오는 순간.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 일본 초대 총리이자 조선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환영하기 위해 모인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난데없는 총성이 울린다. 모두가 떠들썩하게 이토를 열렬하게 환영하는 듯 보였지만 단 한 사람, 대한의 청년 안중근은 이토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 철로에서 즉사했다. 그 순간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에게 포박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외친다. 코레아 후라! 대한 만세. 당시 ‘코레아’를 모르는 외국인이라도 ‘후라’는 알아들었을 것이다. 저 청년은 무엇을 향해 만세를 외치며 온몸으로 저항하고 있는 것일까, 누구라도 강렬하게 의문을 품지 않았을까. 일본은 코레아의 존재 자체를 없앴다고 믿었지만, 코레아는 살아 있었고, 그것도 당당하게 만세를 부르며 살아 있었으며, ‘대일본제국’의 폭주를 멈출 힘이 있었다. 포기하지 않은 한 사람, 깨어 있는 한 사람의 힘이었다.

문학은 시간 속 인물 살려 내는 힘
김훈 『하얼빈』 읽고 안중근 만난 듯
한 사람이 역사 바꾸는 체험 하게 해
안중근의 외침 오래 가슴에 남아

선데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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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과연 역사를 바꿀 수 있을까, 힘없는 한 개인이 과연 역사의 수레바퀴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까. 내 안에서 솟아오르는 이런 질문에 괴로울 때마다, 나는 안중근을 생각하고 유관순을 떠올리고 이순신을 기억한다. 한 사람의 힘은 결코 무력하지 않다. 깨어 있는 한 사람, 권력과 자본의 힘을 빌지 않아도 신념과 지성의 힘으로 세상을 깨우는 사람. 김훈의 역작 『하얼빈』을 읽으며 나는 하얼빈 기차역에서 내가 직접 청년 안중근을 만나고 온 듯한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것은 환상 속 시간여행이 아니라 오직 문학만이 지닌 고유한 힘 때문이다. 아름다운 문학작품은 저 멀리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시간 속 인물을 생생하게 지금 여기에 살아 있게 만든다. 오직 문장의 힘으로. 그 어떤 복잡한 장치도 필요 없이, 오직 문장의 힘으로 한 인물을, 한 시대를, 한 세상을 일구어낸다. 안중근은 유복한 집안에서 사랑받으며 자랐고, 뛰어난 포수이자 용감한 의병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를 ‘아름다운 청년’으로 기억하고 싶다. 청년 안중근은 우리 안에 아직 죽지 않은 젊음과 용기, 품위와 열정을 일깨우기에. 우리가 아무리 나이 들어도 결코 잃어서는 안 될 신념과 투지를 일깨우는 아름다운 청년, 그가 바로 『하얼빈』 속에 살아 숨 쉬는 안중근이다.

김훈의 『하얼빈』에는 이토를 저격한 투사 안중근의 모습뿐 아니라 김아려의 남편이자 현생, 분도, 준생의 아버지이자 조마리아의 아들, 우덕순의 친구였던 안중근의 모습이 환하게 살아 숨 쉰다. 그는 이토를 저격함으로써 그 빛나던 미래와 사랑과 가족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끝내 가족을 사랑했고 삶을 사랑했으며 세상을 사랑했다. 그는 도망을 위한 퇴로를 생각하지 않았다. 이토를 죽여 “이토의 작동을 멈춰서 세상을 이토로부터 풀어놓는 것”만이 중요했기에 자신의 안녕은 생각하지 않았다. 안중근이 살리려던 나라는 이토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슬퍼하는 연기를 함으로써 살아남았던 순종과 친일 각료들의 허울뿐인 대한제국이 아니라, 나라를 빼앗기고 슬퍼하며 곡기를 끊거나 목숨을 끊은 백성들, 군대가 해산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맨손으로 일본군과 싸웠던 군인들, “신발이 없고 모자가 없고 총이 없는 병사들이 악을 쓰다가 쓰러졌던” 참상을 목격한 안중근 자신이 ‘잃어버린 나라’였다.

“나는 일본 제국의 의도를 오해해서 죽인 것이 아니다. 나의 거사는 나의 의견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는 한 번도 조선인에게 주어지지 않은, 절절한 발언권을 얻기 위해 이토를 저격한 것이다. 안중근은 목숨을 구걸하는 데는 일분일초도 쓰지 않았다. 왜 이토를 죽였는지 말하기 위해 이토를 죽인 것이다. 세계만방에 대한독립의 절박함을 말하기 위해, 힘없는 조선인에게는 단 한 번도 주어지지 않는 발언권을 얻기 위해. 이토를 죽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이토를 죽인 것이다. 간절하게, 발언권을 얻기 위해.

일본이 꿈꾸던 동양평화는 일본이 패권을 쥔 채 다른 나라는 꼼짝 못 하는 쥐 죽은 듯 고요한 침묵이었지만, 안중근이 꿈꾸던 동양평화는 동양의 모든 나라 백성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시끌벅적함이 아니었을까. 너희가 매일매일 죽이고 짓밟고 유린하는 우리는 오늘도 분명 살아 있다. 그러니 우리의 목소리를, 우리의 저항을, 우리의 자유와 희망과 꿈을 막지 말라. 안중근이 끝내 맺지 못한 말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세상에서 빛을 찾을 수 없을 때는 내 안에서 빛을 찾아야 한다고 믿으며, 하루하루 간신히 버티던 요즘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빛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김훈의 『하얼빈』이 있다. 안중근의 ‘코레아 후라’가 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순간 기적처럼 세계만방에 울려 퍼진 희망의 빛이 있다. 우리는 그 ‘빛’의 의미를 지켜내야 할 소중한 마음의 ‘빚’이 있다. 나는 그 마음의 빚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코레아, 후라! 안중근의 외침은 오래오래 가슴에 남아 마침내 우리를 또 하나의 안중근으로 만든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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