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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파일] 비상이 일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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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3호 31면

김홍준 사회부문 기자

김홍준 사회부문 기자

비상투성이입니다. 비상(非常)은 쓰기에 따라 묘하게 뜻이 다릅니다. 비상은 ‘이상한’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중국에서는 ‘비상율사(非常律師)우영우(禹英禑)’로 씁니다. ‘뛰어난’이란 뜻도 있지요. 고려 공민왕이 이성계의 활쏘기에 감탄합니다. “이성계는 진실로 비상한 사람이다(태조실록 1권 56번째 기사).” 이 조선왕조실록에 비상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기는 중종(189회)과 선조(148회) 대입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사면령을 내립니다. “비상한 경사가 있으니 마땅히 비상한 은혜를 베풀어야 할 것이다(중종 1년 9월 2일).” 임진왜란의 고초를 겪은 선조에게 신하가 아룁니다. “성상께서 비상한 변(임진왜란)을 만나 비상한 공을 세우시어…(선조 37년 8월 8일).” 이 기록들은 같은 ‘비상’의 묘하게 다른 차이를 보여 줍니다. 실록에서는 지금 영화관에 걸린 ‘비상선언’의 ‘비상(긴급 사태)’을 의미하는 비상이 많지 않습니다. 주로 천재지변의 ‘비상한 이변(또는 변이)’을 언급합니다.

지난 8∼11일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조선 시대 사관이라면 ‘비상한 변이’라고 실록에 남기겠지요. 비상 대응 속, 한 여당 의원이 수해 복구현장에서 망언하고 말았고, 주무 장관은 만찬에 참석해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대통령 지지율 하락으로 비상이 걸린 여권으로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이죠.

비상이 일상이 된 시대다. 한 시민이 비상구를 통해 건물을 빠져나가고 있다. 김성태 객원기자

비상이 일상이 된 시대다. 한 시민이 비상구를 통해 건물을 빠져나가고 있다. 김성태 객원기자

폭우는 물가 비상 단계를 끌어 올렸습니다. 기존 인플레이션 국면에 폭우 피해까지 겹쳤습니다. 한 대형마트에서 만난 고객은 “예전엔 1시간이면 장보기가 끝났는데, 비싸서 고민하느라 들었다 놓다를 반복하다 보니 2시간 넘게 걸린다”며 “그것도 한 번에 3만원 정도로 장보기를 끝냈는데, 요새는 5만원어치 사도 먹을거리가 금세 떨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24일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가 올해 추석 상차림 비용을 짚어 봤습니다. 대형마트를 이용하면 30만7430원. 지난해 28만3616원 대비 8.4% 올랐습니다. 전통시장에 가면 22만4181원에서 24만3273원으로 8.5%나 더 써야 조상님께 한 상 차려 드린답니다. 그래서 일부 가정에서는 “조금이라도 돈이 덜 들게 대행업체에 차례 상차림을 맡기자”는 말도 나옵니다.

비상사태가 물가뿐일까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비상시국은 3년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10~11월 재유행 가능성도 점쳐집니다. 환율 폭주도, 무역 적자도, 약자 복지 공백도, 0.7대 출산율도 비상입니다.

위정자들은 이런 ‘비상’을 해결해야 할 책무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대를 얼마나 해야 할까요. 몰린다 싶으면, 권력을 잡거나 이으려 툭하면 비상을 내겁니다.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체제가 만병통치약처럼 쓰입니다. 여야 주요 3당이 동시에 비대위를 꾸리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그들 나름의 비상’에 제동이 걸렸습니다. 법원은 26일 “비상 상황이 아니다”라면서 국민의힘 비대위 체제를 멈춰 세웠습니다. 국민의힘은 정말 비상 상황에 들어갔습니다.

서울 서대문구의 단골 식당에 갔습니다. 배추김치가 사라진 지 꽤 됐습니다. 사장님이 멋쩍게 웃으며 “조금만 참아요. 대신 갓김치 내주잖아”라며 뿔난 민심을 잠재웁니다. 갓김치는 사장님의 물가 비상대책이었습니다. 배추는 1년 전보다 44%나 올랐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100일 즈음에 북에서 미사일을 쏴 대도 국민은 무덤덤합니다. 비상이 일상이 됐습니다. 비상약을 너무 챙겨 먹다 보니 그만 내성이 생겼습니다. 비상구는 있을까요. 비상이 정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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