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딩 휴머니즘
2020년에 한국은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G7 국가에 도달했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도 대한민국의 정보통신기술(ICT) 수출은 계속해서 호조였다. 특히 ICT의 3대 주력 품목인 ‘반·디·폰(반도체·디스플레이·휴대폰)’은 두 자릿수 성장을 거듭했다. 이제 우리나라는 ICT 분야의 선두주자가 되었지만, 그 과정 속에는 남모르게 고생한 개척자들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ICT가 태동한 것은 1982년 봄이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을 그만두고 귀국한 전길남 박사는 대한민국에서 컴퓨터 네트워크를 연구했다. 그리고 1982년 5월, 서울대 연구실 PC에서 입력된 ‘SNU’라는 문자가 250㎞ 떨어진 구미 전자기술연구소의 PC 모니터에 떴다. 미국에 이어 두 번째 인터넷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국이 군사기밀을 목적으로 감춰왔던 인터넷 기술이 한국에 의해 독자 개발되고 공개된 사건이었다.
미 전자프런티어 재단, IT 공로상 수여
같은 해에 삼성에서는 이건희 회장 주도로 반도체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듬해 12월에 64K D램 개발에 성공한다. 이것이 대한민국 반도체 신화의 서막이었고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뒤흔든 역사적 사건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후진국이나 다름없었다. ICT 분야의 개척자들은 수많은 편견과 장벽부터 뚫어야만 했다. 인터넷을 탄생시킨 전길남 박사도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이 나라에서 처음 ‘컴퓨터 네트워크’를 연구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정부는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지원하지 않았다. 지원은커녕 쓸데없는 일을 한다며 비판만 더했다. 그는 더는 정부에서 일할 수 없게 되자 KAIST로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그곳에서 천신만고 끝에 인터넷을 성공시키며 후학들을 키워냈다. 덕분에 전 교수의 KAIST 연구실에선 김정주(넥슨)·송재경(리니지)·나성균(네오위즈) 등 미래 IT의 거목들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이건희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삼성의 젊은 2세였던 그가 처음 반도체 진출을 모색했을 때 삼성그룹의 사장단은 반대했다. 주요 경영진과 임원들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회사 자금을 쓸 수 없게 되자 반도체에 사활을 걸기 위해 사비를 털어야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게 반도체연구소가 문을 열었고 이윤우(전 삼성전자 부회장)·이임성(전 삼성반도체 미주법인장)·김기남(삼성전자 종합기술원 회장) 등 삼성의 반도체 1세대가 모여 64K D램 개발에 착수할 수 있었다.
이 나라의 개척자만 그런 것은 아니다. 시야를 좀 더 넓혀보자. 전 세계 ICT 분야를 살펴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편견과 장벽에 맞선 개척자 중에 이보다 신선한 인물은 없을 지경이다.
와이파이·블루투스·CDMA(코드분할 다중접속)는 이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진 무선통신 기술이다. 그리고 이 기술의 근간에 ‘주파수 도약’이라는 원천 기술이 있다. 용어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이 기술을 개발한 사람은 사실 아름다운 여배우였다. 그는 1940년대 할리우드를 주름잡았던 여배우이자 당대 섹시 아이콘이었던 헤디 라머다.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백설공주’를 만들 때 그녀를 실사 모델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배트맨’ 시리즈 ‘캣우먼’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라머가 처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에 개봉했던 영화 ‘엑스터시’였다. 여성의 오르가슴을 최초로 묘사한 ‘성인용’이었는데, 그 당시엔 수위가 높다고 판단되어 교황청에서는 이 영화를 몹시 비난했고,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도 상영을 금지했다고 한다.
그 영화 때문이었을까. 사람들은 라머에게 놀라운 지적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그녀의 전 남편이자 무기 제조업계 거물이었던 프리드리히 맨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배우인 아내를 각종 모임에 대동하며 그녀의 미모를 비즈니스에 이용하기에 바빴다. 심지어 군사 기밀이 오가는 자리에서도 그녀를 옆에 두었는데 이것은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머는 비상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대화 하나하나에 집중했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군사 서적을 탐독하며 밤을 새우기도 했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매우 어수선했다. 나치를 혐오했던 라머는 나치와 남편이 무기 거래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의 곁을 떠나 할리우드로 향했다. 그곳에서 배우로서 성공적인 입지를 쌓아가는 한편 틈틈이 군사 기술을 발명하는 이중적인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여배우가 말하는 군사기술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녀의 지적 재능을 유일하게 알아봐 준 사람은 영화 ‘아이언맨’의 롤 모델이자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하워드 휴스였다. 그는 라머에게 실험 장비를 선물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 과학자들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어쩌면 휴스는 그녀와 군사 기술에 관해 얘기를 나눈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당시 전쟁에선 독일군의 전파방해가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것은 연합군이 교신하는 주파수를 찾아내 교란하는 전술이었다. 라머는 연합군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때 그녀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교란당하기 쉬운 하나의 주파수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파수를 끊임없이 바꾸며 교신하는 방법이었다. 문제는 주파수를 주고받는 송수신 매체가 서로 똑같이 호응하며 주파수를 바꿔야 한다는 점이었는데 라머는 그 난제까지 해결했다. 이것을 가리켜 ‘주파수 도약’이라고 한다.
라머는 이 혁신적인 기술 개발로 1941년에 특허까지 취득하게 된다. 그녀의 나이 고작 28세의 일이다. 그리고 전쟁에 도움을 주기 위해 그 특허를 미 해군에 기증하기에 이른다. 문제는 기증받은 사람들의 태도였다. 미 해군은 다음과 같은 말로 라머의 총명함을 싸늘하게 짓밟아 버린다. “아가씨가 이걸 개발했다고? 이봐 아가씨, 전쟁을 돕고 싶다면 나가서 전쟁 채권이나 팔아.”
말이 씨가 된 걸까. 실제로 그녀는 미 정부가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해 만든 ‘전쟁 채권’ 판매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 여정 속에서 할리우드 여배우의 명성으로 노래하고, 춤도 추고, 심지어 투자자들에게 입맞춤해야 하는 경품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그녀가 팔았던 전쟁 채권 규모는 지금 시세로 따지면 3억4300만 달러(약 3886억 원)에 달했다고 한다.
라머의 혁신 기술이 무시당한 것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942년 미군은 라머가 연합군의 적국이었던 오스트리아 출신이란 이유만으로 그녀의 특허권을 빼앗는다. 그리고 ‘주파수 도약’을 1급 군사기밀로 분류해 세상에서 감춰버렸다. 마치 인터넷이 그러했던 것처럼.
전쟁의 향방을 바꿀 수 있었던 한 여성의 노력은 그렇게 물거품이 되었다. 그동안 라머가 살아왔던 삶이 그랬듯 이후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다. 여배우로 살면서 발생한 각종 스캔들, 개척자로서 발생한 사업 실패, 일곱 번의 결혼과 일곱 번의 이혼, 미혼모의 삶, 그리고 사람들을 피해야 했던 은둔자의 삶.
“헤디 라머 없었다면 구글도 없었다”
라머의 숨겨진 업적이 밝혀진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인 1990년의 일이었다. ‘포브스’의 작가였던 플레밍 믹스는 MIT의 천체 물리학자였던 아버지로부터 무선통신에 얽힌 한 여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를 추적하다가 헤디 라머라는 위대한 개척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녀의 나이 77세가 되던 해였다.
1990년 ‘포브스’ 5월 호, 처음으로 주요 언론에서 라머의 이름으로 ‘주파수 도약’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97년엔 미국 전자 프런티어 재단(EFF)이 그녀의 업적을 인정해 IT 공로상을 수여했다. 2015년엔 구글이 라머 탄생 101주년을 기념해 헌정 영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때 구글이 만든 캐치프레이즈는 다음과 같다. ‘헤디 라머가 없었다면 구글도 없었다.’
그리고 2017년 11월, 미국에서 라머의 삶을 재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밤쉘’이 개봉되었다. 우리나라에선 2018년 6월 7일에 개봉되었다. 오늘날 아직도 많은 사람이 무선통신의 개척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발명한 ‘주파수 도약’은 와이파이와 블루투스와 CDMA가 되어 ICT 분야의 근간 기술로 남게 되었다.
라머의 첫 번째 남편이기도 했던 프리드리히 맨들은 그녀가 ‘제2차 세계대전의 마타하리’였다고 깎아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관점에서 라머를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백치가 아니었으며 팜므 파탈도 아니었다. 사실은 ‘무선통신의 어머니’였다고.
오민수 멀티캠퍼스 프로 minsuu.oh@multicmapu.com 정보산업공학을 전공했고 코딩을 배웠으나 글쓰기를 더 좋아한다. 멀티캠퍼스에 입사 후 삼성그룹 파워블로거, 미디어삼성 기자를 병행하면서 ‘디지털 전환’과 관련한 글쓰기를 시작했다. 현재는 ‘멀티캠퍼스’에서 IT 생태계의 저변을 넓히는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