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의 축구 종주국 자존심, 여자축구가 세웠다

중앙선데이

입력 2022.08.27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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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3호 27면

런던 아이

잉글랜드 여자축구팀이 지난달 31일 런던 웸블리스타디움에서 열린 독일과의 UEFA 여자유로 2022 결승전에서 승리한 후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리며 기뻐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잉글랜드 여자축구팀이 지난달 31일 런던 웸블리스타디움에서 열린 독일과의 UEFA 여자유로 2022 결승전에서 승리한 후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리며 기뻐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8월 3일 ‘축구의 나라’ 영국의 한 입장권 예매 사이트가 마비됐다. 한 축구 경기의 입장권을 예매하려는 트래픽이 대거 몰렸기 때문이다. 오는 10월 열리는 잉글랜드와 미국의 친선 축구 경기 입장권이었다. 4만5000여명 이상이 입장권을 사기 위해 온라인에서 몇 시간 동안 대기했다.

이 친선경기는 잉글랜드 여자축구팀과 미국 여자축구팀의 맞대결이다. 오는 10월 7일 런던의 유명한 웸블리구장에서 열린다.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홋스퍼 FC의 해리 케인 같은 유명 선수가 출전하는 경기도 아닌데 이렇게 많은 관중이 모이는 것은 이례적이다.

이처럼 여자축구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잉글랜드 여자축구 대표 팀이 지난달 23일 유럽축구연맹(UEFA) 여자 유로 2022에서 우승하면서부터다. 잉글랜드 축구팀이 국제대회 우승컵을 거머쥔 것은 50여년 만의 일이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수십 년 동안 남자축구 뒤에 가려져 있었지만 이제 영국에서 여자축구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축구협회와 여자대표팀 선수들은 축구뿐 아니라 스포츠 전반에서 여성의 위상에 변화를 이뤄 내기 위해 노력 중이다.

왜 이번 우승에 영국인들이 이렇게 환호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오랫동안 잉글랜드가 축구 경기에서 우승을 못 했다는 점이다. 이는 영국인들의 마음속에 큰 영향을 미쳐 왔다. 물론 영국 축구가 아닌 잉글랜드 축구에 대한 이야기다. 영국 안에서 축구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지역팀이 따로따로 경쟁한다.

여자축구 인기 폭발, 예매 사이트 마비

잉글랜드 알레시아 루소(오른쪽)가 독일 마리나 헤게링과 볼을 다투고 있다. [AFP=연합뉴스]

잉글랜드 알레시아 루소(오른쪽)가 독일 마리나 헤게링과 볼을 다투고 있다. [AFP=연합뉴스]

많은 스포츠처럼 영국인들은 축구가 잉글랜드에서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고대 중국,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도 축구와 비슷한 게임이 있었다는 증거가 많기 때문에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현재 통용되는 축구 게임의 룰이나 방식이 잉글랜드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사실이다.

잉글랜드는 축구에 대한 강한 주인의식을 느끼고 있다. 한 가지 예로 축구 응원가 ‘세 사자들(Three Lions)’이 있다. 1996년 발매된 곡으로 200만장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더블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 이 노래의 후렴구는 ‘축구가 고향에 돌아온다(football’s coming home)’이다. 이 후렴구 덕분에 이 노래는 영국 최고의 축구 응원가가 됐다. 이 노래가 인기 있는 이유는 명확하다. 축구는 잉글랜드의 것이고, 잉글랜드에서 발명되었고, 영국인은 축구를 사랑하고, 우승 트로피를 계속 따낼 것이라는 영국인의 포부가 담겨 있다. 영국 조사기관 유고브(YouGov)에 따르면 영국 인구의 38%가 특정 축구팀의 팬이라고 말한다. 이는 럭비나 테니스, 크리켓 팬의 숫자보다 두 배 이상 많다. 하지만 이처럼 높은 축구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어떤 축구경기에서도 우승컵은 ‘축구의 고향’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못했다.

잉글랜드 남자축구팀은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Euros)에서도, UEFA 네이션스컵(Nations Cup)에서도 우승한 적이 없으며, 1966년 이후 FIFA 월드컵 우승도 없었다. 여자팀 역시 올해 유로 대회 이전까지는 주요 대회에서 단 한 번도 우승한 적이 없다.

길고 긴 기다림 끝에 올해 여자 유로 2022에서 올린 잉글랜드 여자축구팀의 성과는 영국 전체를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대회 기간 내내 열기가 점차 고조되어 갔고, 결승전 땐 나라 전체가 들썩였다.

영국 여자축구는 그동안 그다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여자축구팀들은 여전히 작은 경기장에서 뛰고 있으며 관중의 수는 적고 벌어들이는 수입도 남자팀들보다 현저히 적은 게 사실이다. 여자 경기를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인식은 점점 커지고 있었지만 이번 우승 전까지는 사실 진정한 관심은 없었다.

여자 유로 2022경기가 시작됐을 때만 해도 팬들의 지지는 상당히 엇갈렸다. 하지만 경기가 진행되면서 축구팬들의 생각은 달라졌다. 잉글랜드는 조별 리그에서 단 한 골도 내주지 않고 14골을 넣었고, 결선 토너먼트에서 스페인과 스웨덴 그리고 잉글랜드의 숙적인 독일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 결승전은 1700만 명이 TV를 통해 시청했는데, 이는 영국에서 열린 여자 축구경기 중 가장 많은 관중 수였다.

그러나 이제 열기는 어느 정도 가라앉았고, 유로 우승 트로피는 앞으로 4년 동안 어딘가에 보관될 것이다. 이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여자축구가 다시는 과거의 무명 시절로 돌아가지 않도록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영국 내 여자축구는 이번 유로 2022로 큰 힘을 얻었고, 아마 그 인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대회가 끝난 후 유고브(YouGov)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영국인의 46%가 앞으로 여자축구 경기를 볼 것이라고 답했다. 이는 이전 여자축구 팬보다 훨씬 더 많은 수치로 이번 유로 2022가 새로운 축구팬의 세대를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여자 유로 2022는 영국과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많은 국가에서 여자축구가 받아왔던 평가를 완전히 바꿔 놨다. 여자축구는 그동안 남자축구만큼 흥미롭지도, 신나지도, 경쟁적이지도 않으며, 여성은 남성에 비해 신체를 많이 쓰지 않고 달려들거나 반칙을 하지 않는다는 등의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유로 결승전에서 보여 준 여자축구는 이 같은 평가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경기에서는 선수들의 육탄전이 계속됐다. 마지막엔 승리를 확정 짓기 위한 고의적인 시간 끌기도 등장했다. 이로써 영국과 독일의 여자축구 대표팀은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스포츠 내 성차별적인 논쟁을 종식시켰다.

영국 중·고교 여학생 44%만 축구 허용

지난 8월 1일 런던 트라팔가광장에서 열린 잉글랜드 우승 기념행사에서 시민들이 잉글랜드기를 흔들며 환호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8월 1일 런던 트라팔가광장에서 열린 잉글랜드 우승 기념행사에서 시민들이 잉글랜드기를 흔들며 환호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하지만 남자 스포츠와 동등한 위치에 놓이기 위해서는 여전히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가장 큰 문제는 경기를 위한 기반이다. 세계의 많은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영국 학교들은 여학생들에게 남학생들이 받는 것과 동등한 스포츠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기회가 제공된다고 해도 여학생들은 남학생과 다른 종목의 스포츠를 하게 된다. 많은 영국 학교에서 네트볼은 여자 스포츠로, 럭비와 크리켓, 축구는 남자 스포츠로 여겨진다. 이런 분류는 남학생과 여학생 사이에 엄청난 기회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학교에서 7년 동안 축구가 아닌 네트볼을 하도록 강요받은 여자 신예 축구 선수들은 미래가 불투명하다. 축구·럭비·크리켓은 선수로서의 평생 경력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네트볼은 스포츠 선수로서의 경력을 쌓는 경로라기보다 취미에 가깝다.

이 같은 종목의 차이는 매우 어린 나이부터 시작된다. 영국의 스포츠 관리 단체 중 하나인 유스 스포츠 트러스트(Youth Sport Trust)에 따르면, 7세가 되면 여학생들은 학교 체육시간이나 과외활동에서 배울 수 있는 기본 동작이나 스포츠 기술의 발달에서 남학생보다 이미 1년 정도 뒤처진다.

영국 학교에서는 전체 교과 과정에서 여학생의 63%만이 축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며, 중등학교(중·고교)의 44%만이 여학생이 축구를 하는 것을 허용한다. 이에 대해 잉글랜드 여자 축구팀은 정부에 변화를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23명의 선수가 서명한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어린 학생들이 축구를 할 수 있도록 많은 영감을 주고 있지만, 많은 여학생은 결국 학교에서 축구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자라면서 경험한 일입니다. 축구를 하지 못하도록 제지당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만의 팀을 만들고 전국을 여행했습니다. 이런 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축구를 했습니다. 요즘 세대 여학생들에게는 저희보다 더 많은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점심시간에 축구를 할 수 있고, 체육 수업에서 축구를 할 수 있으며, 언젠가 잉글랜드 대표로 뛸 수 있다고 믿을 자격이 있습니다.”

※번역: 유진실

짐 불리(Jim Bulley) 코리아중앙데일리 에디터 jim.bulley@joongang.co.kr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한때 영국 지역 신문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한국에 왔고 현재 코리아중앙데일리 경제·스포츠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KBS월드, TBS(교통방송), 아리랑TV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진행자 및 패널로 출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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