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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기술력 앞섰지만…‘큰손’ 애플 3나노도 TSMC에 위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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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3호 14면

파운드리 시장 혈투

삼성전자는 지난달 반도체 제조 공정 가운데 가장 앞선 기술인 GAA 기술을 적용한 3㎚ 파운드리 공정 기반의 반도체 양산을 시작했다. [뉴스1]

삼성전자는 지난달 반도체 제조 공정 가운데 가장 앞선 기술인 GAA 기술을 적용한 3㎚ 파운드리 공정 기반의 반도체 양산을 시작했다. [뉴스1]

“언젠가 삼성전자가 TSMC를 이길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게 3㎚(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반도체는 아닐 것이다.” “애플과 AMD 등이 TSMC에 독점적으로 물량을 주고 있어 다른 업체가 TSMC의 시장점유율을 가져가긴 어려워 보인다.”

3㎚ 반도체 기술 개발을 놓고 삼성전자와 대만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TSMC가 경쟁을 벌이던 지난 2020년 미국 반도체 전문가 커뮤니티인 세미위키(semiwiki)에 올라온 글이다. 아직 3㎚ 반도체가 양산을 시작하기도 전에 나온 예상인데, 이 예상은 2년이 지난 지금 현실이 되고 있다. 지난 6월 말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3㎚ 반도체 양산품을 출하한지 두 달여 만에 애플이 TSMC의 3㎚ 반도체 첫 고객으로 이름 올렸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미국의 정보통신(IT) 업체인 애플은 파운드리 시장에서 큰손으로 통한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5㎚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 출하량의 53%가 애플의 주문이었다. 5㎚ 반도체는 품질이 검증된 기술 가운데 최첨단 공정으로 여겨진다. 애플은 2020년 출시한 아이폰12와 맥북, 아이패드 등을 비롯해 오는 9월부터 판매하는 아이폰14에 들어가는 칩셋도 TSMC 5㎚ 공정을 통해 생산하고 있다.

애플, 스마트폰 경쟁자 삼성에 안 맡겨

애플의 존재는 TSMC에 절대적이다. 지난해 TSMC의 매출액 572억 달러(약 76조원) 가운데 23% 가량인 138억 달러(약 18조원)가 애플로부터 나왔다. 대만 최대 IT 전문 매체 디지타임스는 올해 TSMC가 애플로부터 받아올 주문이 170억6000만 달러(약 23조원)어치에 이를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먼저 3㎚ 반도체를, 그것도 신기술인 게이트올어라운드(GAA) 방식으로 양산을 시작하면서 파운드리 시장에 균열이 생기는 것 같았지만, 애플이 이전 기술인 핀펫(FinFET)을 개량해 3㎚ 양산에 나선 TSMC를 선택한 것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예전부터 애플이 TSMC에 생산을 맡기고 있었기 때문에 놀랄 일은 아니다”라며 말을 아꼈다. 애플은 지난 2016년 삼성과 TSMC에 동시에 물량을 맡기기도 했지만, 이후부터는 계속 TSMC에 생산을 맡기고 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애플이 기술적 측면에서 한 수 뒤쳐진 TSMC를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우선 ‘캡티브마켓’(전속 시장)의 역설을 지목한다. 삼성전자는 자사 반도체를 탑재할 수 있는 스마트폰 ‘갤럭시’를 캡티브마켓으로 보유하고 있다. 애플 입장에선 스마트폰 사업 경쟁자에게 핵심 영업 비밀인 설계도를 맡기기 쉽지 않은 셈이다. 예컨대 2016년 이전까지만 해도 삼성전자에서 만든 자체 AP(스마트폰 중앙처리장치)인 엑시노스가 발군의 성능을 발휘하자 국내외 스마트폰 이용자 커뮤니티에선 삼성전자가 애플의 AP 설계도를 참고해 엑시노스를 설계한 것 아니냐는 루머가 나오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애플과 에이콘, VLSI테크놀로지 등이 설립한 팹리스 업체 ARM으로부터 구조도(아키텍처) 라이센스를 구매했음에도,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의 경쟁자로 여겨진 탓에 이런 루머가 나온 것이다. 반면 TSMC는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전략으로 반도체만 만들고 있어 경쟁을 벌일 여지가 없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고객과의 경쟁’ 여부가 파운드리 시장의 희비를 가를 만큼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라 지적한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시장에서 품질과 기술의 초격차를 확보한다면, 애플이라 해도 삼성전자에 주문을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센터장은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것도 기술적으로 비슷할 때나 의미가 있지 성능 차이가 확연하다면 애플도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GAA 기술을 처음 적용한 삼성전자가 품질 측면에서 TSMC보다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품질의 척도 가운데 하나인 수율(결함 없는 합격품 비율)을 높이기 위해선 생산 경험을 쌓는 것이 최선책으로 여겨지는데, 삼성전자에 3㎚ 반도체 생산을 맡긴 대형 업체를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까지 삼성전자의 3㎚ 반도체 고객으로 알려진 곳은 비트코인 채굴용 반도체 업체(팹리스)인 중국 판세미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TSMC엔 애플이 첫 고객사로 이름을 올렸으니 3㎚ 반도체의 품질 경쟁에서도 TSMC가 우위를 점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것이다. ‘애플’이라는 이름값도 이름값이지만, 파운드리 시장에서 애플만큼 대량 주문을 넣는 곳을 찾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파운드리 사업에서 대량 주문 고객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고객이 제시한 설계도에 맞춰 위탁 생산하는 파운드리 사업 특성 때문이다. 고객마다 설계도가 다른 까닭에 주문 업체가 달라지면 전혀 다른 제품을 생산해야 한다. 예컨대 10개의 제품을 100개씩 만든 업체보다 한 제품을 1000개 이상 만들어 본 업체가 불량률을 낮추기 쉽다. 애플 아이폰의 지난해 연간 판매량은 2억3700만대에 이른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IDC가 집계한 아이패드와 맥북 시리즈의 지난해 연간 판매량도 각각 5780만대와 2890만대 수준이다. 이들 제품에 들어가는 시스템반도체를 모두 TSMC가 위탁 생산한 만큼 생산 경험을 쌓기에도 삼성전자보다 유리했던 것이다. 올 들어 삼성전자가 수율 문제로 고전하는 사이 TSMC의 5㎚ 반도체에서는 별다른 잡음이 나오지 않은 이유도 결국은 생산 경험 차이가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삼성, GAA 기술 초격차 벌려야 승산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애플을 등에 업은 TSMC가 수율에서 우위를 가져가고 있다는 점은 반도체 업계 전략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고 있다. 대니얼 내니 세미위키 설립자는 “TSMC는 이제 무어의 법칙이 어리석은 수고(errand)라는 것을 알고 있다”며 “TSMC는 매년 새로운 공정을 제공하는 대신 반발자국 느리게 가면서 수율을 높이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삼성전자가 3㎚부터 GAA 기술을 적용한 것과 달리 TSMC는 기존의 핀펫 기술을 개량한 것도 이와 비슷한 행보다. 핀펫 기술을 개량한 핀플렉스 기술 역시 난도가 높은 기술인 건 맞지만, 삼성전자의 GAA 기술보다는 수율을 확보하기 유리할 것이란 게 반도체 업계의 공통된 전망이다. 웨이저자 TSMC 최고경영자도 “3㎚ 공정은 올 하반기 중에 높은 수율로 양산될 것”이라 언급하며 수율에 자신감을 내비친 바 있다. 다만, 노 센터장은 “TSMC의 핀플렉스 기술은 핀펫 기반이기는 하지만 노광장비(EUV)는 기존 장비와 다른 것을 써야하기 때문에 품질을 확보하고 본격적으로 양산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파운드리 시장의 진짜 혈투는 TSMC가 GAA 기술을 적용해 생산할 2㎚ 반도체에서 벌어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여기서도 애플만한 업체를 확보해야 앞으로 수율 싸움에서 TSMC와 경쟁할 수 있다는 점이 삼성전자의 숙제다. 그러다 보니 시장의 관심은 퀄컴에 쏠린다. 퀄컴은 지난해 매출액 293억 달러(약 39조원)를 기록한 팹리스(반도체 설계) 업계 1위로, 최근 수년간 삼성전자와 TSMC에 번갈아 가면서 주문을 낸 바 있다. 퀄컴은 차기 AP인 스냅드래곤8 2세대를 TSMC의 4㎚를 통해 양산할 계획이지만 삼성전자가 품질을 끌어올린다면 3㎚ 고객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은 “AP 점유율 1위인 퀄컴은 장기적으로는 주문을 나눠서 주면서 파운드리 간 경쟁을 유도할 것”이라며 “당장은 삼성전자의 3㎚ 수율이 TSMC의 핀플렉스와 비교해 밀리지 않는지가 승패를 가를 요소”라고 말했다. 이어 “TSMC도 2㎚ 반도체에서는 어차피 GAA로 가야 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삼성전자가 고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리한 상황도 아니다”라며 “GAA 기술이 완숙기에 접어들면 TSMC와의 기술 격차를 더 벌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핀플렉스(FINFLEX)=TSMC가 5㎚ 반도체를 만들 때 사용한 핀펫(FinFET) 기술을 기반으로 개발한 3㎚ 반도체 생산 기술. 핀펫은 전류가 흐르는 채널과 게이트가 상어 지느러미(Fin)처럼 솟았다는 점에 착안해 붙은 이름인데, 핀플렉스는 채널과 게이트의 높이를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게이트올어라운드(GAA)=반도체 회로 선폭이 미세화되면서 전류 누설이 문제가 되자 이를 막기 위해 개발된 기술. 게이트로 감싼다는 뜻으로 이름 그대로 전류가 흐르는 채널의 4면을 게이트로 활용한다. 기존의 핀펫 기술에선 앞면과 뒷면, 윗면 등 3면을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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