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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달린다, 고로 존재한다] 원하는 모임 골라, 폼나게 의미있게 뛰고, 뒤풀이 없이 끝…따로 또 같이 비대면 기록 경쟁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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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3호 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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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일부터 21일까지 1박2일 동안 코오롱스포츠가 주최한 ‘로드랩 제주 50K’ 참가자들의 모습. 첫째 날 코스였던 한라산 둘레길(천아숲길~돌오름길) 20㎞는 키 큰 나무들이 울창한 숲길로 한여름에도 시원한 그늘을 만들기 때문에 달리기에 안성맞춤이다. 정준희 기자

8월 20일부터 21일까지 1박2일 동안 코오롱스포츠가 주최한 ‘로드랩 제주 50K’ 참가자들의 모습. 첫째 날 코스였던 한라산 둘레길(천아숲길~돌오름길) 20㎞는 키 큰 나무들이 울창한 숲길로 한여름에도 시원한 그늘을 만들기 때문에 달리기에 안성맞춤이다. 정준희 기자

지난 20일부터 21일까지 코오롱스포츠가 주최하는 ‘로드랩 제주 50K’가 열렸다. 한라산 일대 50km를 1박2일 동안 완주하는 트레일 러닝 행사다. ‘트레일 러닝’이란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나 트랙을 달리는 ‘로드 러닝’과는 달리 산·초원·숲길 등 자연 속을 달리는 산악 마라톤을 말한다. ‘로드랩 제주 50K’는 첫째 날 ▶한라산 둘레길 중 천아숲길~돌오름길 20km, 둘째 날 ▶해발 1706m의 한라산 영실~돈내코 순환코스 30km를 달리는 코스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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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접수로 전국에서 모인 참가자는 약 50명. 대부분 2030세대인 이들은 첫날부터 생기가 넘쳤다. 경남 진주에 사는 정명교(27)씨는 “제주도 여행을 혼자 계획했는데 한라산을 혼자 오르는 건 좀 부담스러워서 행사에 참가했다”며 “한라산을 뛴다는 게 너무 기대된다”고 했다. 그는 또 “올해 4월부터 러닝 크루(달리기 동호회)를 시작해 트레일 러닝에 흠뻑 빠졌다”며 “로드 러닝과는 다르게 산에서 달리는 건 힘은 들지만 그만큼 쾌감이 크다”고 했다.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왔다는 송은화(36)·송은우(31) 부부는 “전국에서 열리는 트레일 러닝 행사에 여러 번 함께 참가했다”며 “마침 신혼여행 기간 중 한라산 둘레길을 달리는 행사가 있다고 해서 특별한 추억을 만들기 위해 참가했다”고 했다.

첫째 날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둘째 날은 새벽 6시30분부터 오후 4시까지 내내 달리는 일정은 듣기만 해도 벅차다. 아침 식사만 하고 점심은 패스. 중간 중간 스태프들이 준비한 물과 바나나 정도만 먹으며 계속 달려야 하는 강행군이었지만 참가자들은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도 시종일관 밝은 얼굴이었다. 안개낀 한라산 둘레길을 뛰는 중간 중간 멈춰서 “도깨비가 나올 것 같아” “혹시 공유가? 까르르!” 웃으며 인증샷 찍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달릴 때도 ‘폼생폼사’가 중요해

8월 20일부터 21일까지 1박2일 동안 코오롱스포츠가 주최한 ‘로드랩 제주 50K’ 참가자들의 모습. 첫째 날 코스였던 한라산 둘레길(천아숲길~돌오름길) 20㎞는 키 큰 나무들이 울창한 숲길로 한여름에도 시원한 그늘을 만들기 때문에 달리기에 안성맞춤이다. 정준희 기자

8월 20일부터 21일까지 1박2일 동안 코오롱스포츠가 주최한 ‘로드랩 제주 50K’ 참가자들의 모습. 첫째 날 코스였던 한라산 둘레길(천아숲길~돌오름길) 20㎞는 키 큰 나무들이 울창한 숲길로 한여름에도 시원한 그늘을 만들기 때문에 달리기에 안성맞춤이다. 정준희 기자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소설 쓰는 방법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첫 장에 쓰인 말이다. 문학과 삶을 향한 치열한 도전을 위해 매일 쉬지 않고 달렸다는 하루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달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중앙대학교 체육대학 스포츠과학부 권용웅 교수는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이 걷기에서 더 나아가 달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신체 컨디션이 좋고 건강하다는 이야기”라며 “부상을 입었던 선수들도 스스로의 힘으로 달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재활에 성공했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갖는데 이는 일반 러너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설명했다. ‘달리기’라는 단순한 동작이 육체적·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데 끼치는 영향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2019년 오프라인으로 진행된 ‘노스페이스 100 코리아’ 중 플로깅 이벤트 참가자들이 손에 쓰레기 봉투를 들고 달리는 모습. [사진 노스페이스]

2019년 오프라인으로 진행된 ‘노스페이스 100 코리아’ 중 플로깅 이벤트 참가자들이 손에 쓰레기 봉투를 들고 달리는 모습. [사진 노스페이스]

최근 몇 년 사이 MZ세대를 중심으로 ‘러닝 크루(Running Crew)’ 열풍이 불고 있다. 서울마라톤협회에 등록된 직장·지역 마라톤 동호회와는 달리 이들은 인스타그램이나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을 통해 모임을 공지하고, 정해진 날짜·장소에 모여 함께 달린 후 흩어진다. 서울 시내 유명 러닝 크루의 인스타그램 팔로워 숫자(8/23 기준)를 보면 ‘와우산30(wausan30)’ 3321명, SRC(Social Running Crew) 8779명, JSRC(Jam Sil Running Club) 6770명이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그룹채팅에서 검색어를 입력하면 ‘러닝’ 540개, ‘런닝’ 456개, ‘러닝크루’ 500개가 검색된다(중복 포함). 많게는 몇 백 명, 적게는 2~3명이 멤버인 러닝 크루들이다.

JSRC(잠실 서울 러닝 클럽) 러닝 크루들이 저녁시간에 달리는 모습. [사진 JSRC]

JSRC(잠실 서울 러닝 클럽) 러닝 크루들이 저녁시간에 달리는 모습. [사진 JSRC]

이들 MZ세대 러닝 크루가 아재들의 마라톤 동호회와 다른 점은 철저한 ‘자율성’이다. 동호회라는 ‘조직’은 거부하고 SNS를 통해 내가 원하는 것(장소·시간)만 골라 취향껏 뛰며 즐기겠다는 것. JSRC 고영두 리더는 “크루 이름에 동네 이름 ‘잠실’을 붙였지만 잠실에 살지 않는 사람도 매주 금요일 밤에 모여 1시간~1시간30분 동안 함께 뛴다”며 “금요일 정규 러닝 외에 번개 러닝으로 서울 도심 곳곳에서 달리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달리기 후 아재들이라면 흔히 가질 법한 뒤풀이 술자리 등의 친목 모임도 거부한다. 고 리더는 “기존 마라톤 동호회가 42.195km 풀 마라톤을 대비해 하드하게 뛰는 게 중요했다면, MZ세대의 목표는 즐겁게 달리는 것”이라며 “가볍게 달리는 동안 좋아하는 주제로 수다를 떨고 그날의 코스를 완주한 후에는 쿨하게 헤어진다”고 했다.

일주일간의 신혼여행 마지막 일정으로 ‘로드랩 제주 50K’에 참가한 송은우·송은화 커플. 정준희 기자

일주일간의 신혼여행 마지막 일정으로 ‘로드랩 제주 50K’에 참가한 송은우·송은화 커플. 정준희 기자

MZ세대 러닝 크루에도 정회원과 비회원, 운영요원의 구분은 있다. 정회원에는 SNS 커뮤니티 참가 자격이 주어지는데 대부분의 젊은 러닝 크루들은 2030세대에만 가입자격을 준단다. “공지된 장소에 모여 함께 달릴 때는 나이를 구분하지 않지만, 취향 저격의 대화들이 이어지는 커뮤니티 안에선 또래들끼리 젊은 에너지를 공유하고 싶어서”라는 게 이유다. 요즘 젊은이들이 자주 쓰는 신조어도 잘 모르고, 나이·학교·직업부터 궁금해하는 대화방식에서 느껴지는 세대차이가 불편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지루한 달리기 싫다는 ‘개념세대’

패션잡지 엘르가 9월 한 달 간 대면과 비대면, 두 가지 형태로 진행 예정인 ‘엘르런’ 기념 굿즈(티셔츠). [사진 엘르]

패션잡지 엘르가 9월 한 달 간 대면과 비대면, 두 가지 형태로 진행 예정인 ‘엘르런’ 기념 굿즈(티셔츠). [사진 엘르]

MZ세대 러닝 크루의 또 다른 특징은 ‘멋’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하루를 마감하며 ‘달리고 있는 나’가 멋지게 보이도록 꾸미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MZ세대에게 인스타그램 ‘인증샷’은 필요충분조건이기 때문이다. 10년째 친구 서너 명과 달리기를 하고 있다는 이신명(32)씨는 “시작할 때는 골프·테니스처럼 돈이 많이 들지 않지만 빠져들수록 장비 욕심이 생긴다”고 했다. 쿠션이 생명인 러닝화는 기능적인 면에서 주기적으로 교체해야 하지만, ‘오늘의 깔맞춤’이 은근 신경 쓰여서 비주얼적인 면으로도 여러 켤레를 준비하게 된다는 크루들이 많다. 양말이나 헤어·손목 밴드, 관절 테이프 등은 이미 색색의 화려한 컬러로 출시된 제품들이 많아 남녀 모두 부담 없이 감각을 뽐내기에 안성맞춤이다.

‘엘르런’ 기념 굿즈(메달). [사진 엘르]

‘엘르런’ 기념 굿즈(메달). [사진 엘르]

소속 크루끼리 맞춰 입는 티셔츠·모자·후드티 등 ‘굿즈’도 중요하다. 다양한 달리기 행사를 찾아다니며 ‘도장깨기(유명 무술 도장을 찾아가 그 곳의 유명한 강자들을 꺾는다는 의미)’를 하는 이유 중 하나도 해당 대회에서만 받을 수 있는 메달·배지 등의 굿즈가 있기 때문이다. 수 백 장의 티셔츠를 모으고, 그것으로 에세이 『무라카미 T-내가 사랑한 티셔츠』까지 낸 작가 하루키의 옷장 속에도 전 세계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며 모은 티셔츠가 가득하다.

MZ세대 러닝 크루 중에는 ‘개념 달리기’를 즐기는 이들도 있다. 2016년 스웨덴에서 시작된 ‘플로깅’이 대표적인 예다. ‘이삭을 줍는다’는 의미의 스웨덴어 ‘플로카 업(plocka upp)’과 영어 ‘조깅(jogging)’의 합성어로 쓰레기를 줍기 위해 앉았다 일어나는 동작 때문에 이름 붙여졌다. 플로깅은 쓰레기를 담은 봉투를 들고 뛰면서 중간 중간 스쿼트 자세를 취하기 때문에 단순한 조깅(달리기)보다 칼로리 소비가 많고 환경보호도 동시에 챙길 수 있어 개념세대(의미와 가치를 중시하는 젊은 세대)에서 인기다. 2019년 국립국어원은 ‘플로깅’을 대체할 우리말로 ‘쓰담달리기’를 제안했다. 쓰레기를 담으며 달린다는 의미다.

이 외에도 서울 둘레길을 뛰는 ‘한양도성길 레이스’, 도심의 야경을 즐기는 ‘나이트 러닝’, 도심 구석구석을 달리는 ‘시티 러닝’ 등 프로그램이 세분화되고 있다. 코오롱 스포츠가 9월부터 전개하는 ‘로드랩 서울’ 프로그램에선 여성들만 뛰는 청계산 하이킹, 도심과 숲길을 병행해 달리는 시티 트레일 러닝, 쓰레기를 줍는 쓰담쓰담 솟솟, 달리기 코스 중간 중간 위치한 건축·문화유산을 둘러보는 로컬 어드벤처 등이 진행된다.

#모이지 않고 겨루는 버추얼 레이스

2년 넘게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집에만 갇혀 있던 MZ세대 아웃도어 에너지가 폭발하고 있다. 날씨가 선선해지는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열리는 각종 러닝 행사들이 속속 참가자를 모집하고 있다.

8월 17일 서울 도심을 달리는 ‘7979 서울 어반 러닝크루(SURC·Seoul Urban Running Crew)’가 첫 러닝을 시작했다. 10월 20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9시 서울 도심 야간 코스 ▶청와대~인사동(5.5K) ▶덕수궁~청계천(5.2K) ▶창경궁~대학로(6.6K) 3개 코스 중 1개를 선택해 달리는 행사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9월 24일에는 패션잡지 엘르가 주최하는 ‘별마당길 나이트 런’이 열린다. 스타필드 코엑스 몰 마감 후 밤 10시부터 별마당길을 달리는 행사로 마지막에는 DJ파티도 있다. 10월 2일에는 뉴발란스와 JTBC가 주최하는 ‘2022 우먼스 런 온 서울’이 열린다. 여의도공원 문화의 마당을 출발해 도심 속을 뛰는 10km 로드 러닝 레이스다.

디지털 게임 세대인 MZ세대에 맞춤인 버추얼 레이스도 있다. ‘가상 마라톤’ ‘랜선 마라톤’이라고도 불리는데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됐던 시기에 열렸던 비대면 달리기 방식이다. 참여방법은 간단하다. GPS 기반 기록 측정 애플리케이션 ‘스트라바(strava)’를 다운받고, 메뉴에서 참가 행사를 검색한 다음 목표 거리를 선택한다. 이후 정해진 기간 동안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혼자 달린 후 기록을 등록하면 완주 인증이 끝난다. 스포츠 브랜드 룰루레몬이 매년 8월 캐나다 밴쿠버에서 주최했던 ‘씨위즈’ 마라톤의 경우 오프라인에는 평균 1만 명 정도가 참가한 반면, 2020년 버추얼 레이스 때는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5만명이 참가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올해 6월 17일부터 7월 10일까지 진행된 ‘2022 노스페이스 100 강원 버추얼 레이스’에는 선착순 모집으로 2500명이 참가했다. 노스페이스 관계자는 “오프라인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뛰며 느끼는 특유의 분위기는 없지만, 일반 마라톤보다 부담은 덜하고 뛰는 재미는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며 “내가 직접 뛰면서 만든 코스들을 공유할 수도 있어 만족도 또한 높다”고 했다.

“달리기를 발견했고 나는 자유를 얻었다. 달릴 때는 다른 사람의 평가가 두렵지 않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으로 내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달리기와 존재하기』의 저자 조지 쉬언의 말이다.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는 개운함을 위해,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려고, 점점 빨라지는 기록에서 성취감을 얻으며, 인스타그램에 완주 인증샷 올리는 재미를 위해. 이유는 제 각각이지만 달리면서 ‘나의 존재와 삶의 이유’를 찾는 젊은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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