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영상 지워달라" 이용구 유죄…法 '나에게만 삭제' 주목했다 [法ON]

중앙일보

입력

法ON

法ON’ 외 더 많은 상품도 함께 구독해보세요.

도 함께 구독하시겠어요?

술에 취해 택시 기사를 폭행하고, 폭행 영상을 지우게 한 혐의를 받는 이용구 전 법무부 차관에 대해 1심 재판부가 모두 유죄로 판단했습니다. 25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2부(조승우·방윤섭·김현순 부장판사)는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운전자폭행등)과 증거 인멸 교사 혐의로 기소된 이 전 차관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2020년 11월 사건 발생으로부터 1년 9개월 만에 나온 법원 1심 판단입니다.

술에 취해 운전 중인 택시기사를 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용구 전 법무부 차관이 25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을 마치고 이동하고 있다. 뉴스1

술에 취해 운전 중인 택시기사를 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용구 전 법무부 차관이 25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을 마치고 이동하고 있다. 뉴스1

2020년 11월에 무슨 일이

이 전 차관은 지난 2020년 11월 6일 밤 자신의 아파트 근처 도로에 잠시 멈춘 택시 안에서 기사에게 욕을 하며 십 수 초간 목을 움켜잡은 혐의를 받았습니다. 피해 기사는 다음 날 블랙박스 업체를 찾아가 해당 영상을 휴대전화로 촬영해 저장했고, 이를 이 전 차관에게 보냈는데요. 영상을 확인한 이 전 차관은 피해 기사를 만나 합의하고 1000만원을 송금했습니다. 그날 저녁, 이 전 차관은 피해 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영상을 지워주시면 어떻겠냐"며 영상을 지워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때 피해기사의 답은 "지우긴 뭘 지워요, 안 보여주면 되지"였다고 합니다.

이 전 차관은 재차 기사에게 전화해 "피해자가 운전석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 폭행이 이뤄지면 특가법상 운전자 폭행이 될 수 있다"며 "내려서 깨우는 과정에서 폭행을 당했다는 취지로 말해줄 수 있느냐"고 부탁했습니다.

이 부탁을 받은 피해 기사는 경찰서에 가 "블랙박스에 녹화된 폭행 영상이 없고, 블랙박스 업체에서도 확인 못 하더라"는 취지로 진술했습니다. 그리고 조사를 받던 중 이 전 차관과의 카카오톡 채팅방에 있던 폭행 영상을 '나에게서만 삭제'하는 방식으로 지웠습니다.

카톡방 '나에게서만 삭제'도 증거인멸?

재판 과정에서 이 전 차관은 특가법상 운전자 폭행 혐의는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증거인멸 교사 혐의는 강하게 부인했습니다.

① 동영상 원본은 물론 사본까지 피해 기사 휴대전화에는 여러 파일이 남아있었다. (카톡방) '나에게서만 삭제'는 증거 인멸로 볼 수 없다.

②피해 기사는 영상을 지워달라는 부탁을 받은 뒤 "지우긴 뭘 지워요, 안 보여주면 되지"와 같은 말로 이미 거절 의사를 밝혔다. 이 전 차관의 부탁으로 인해 영상을 지운 게 아니고, 경찰서에다가 "영상이 없다"고 말한 것이 거짓이라는 게 들통날까 봐 스스로 지운 것이다.

③영상을 지워달라고 한 건 증거 인멸을 해달라는 게 아니고 언론에 유포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법원 "유죄 넉넉히 인정"

하지만 재판부는 이 전 차관의 증거인멸교사 범행이 넉넉히 유죄로 인정된다고 봤습니다. 우선 '나에게서만 삭제'도 증거인멸이라고 봤습니다. 재판부는 디지털 증거의 특성상, 복제된 증거도 원본과는 독립된 가치를 가진다고 설명했습니다. 만약 경찰이 끝까지 영상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가정하면, 이 카카오톡 채팅방에 남아있던 영상이 유무죄 판단이나 양형 자료로 사용됐을 수 있다는 거죠. "형사사법작용에 추상적으로나마 위험성을 야기했다"는 겁니다. 형법에서 말하는 '증거'는 '수사기관이나 법원이 형벌권 유무를 확인하는 데에 관계있다고 인정되는 일체의 자료'라고도 했습니다.

재판부는 또 피해 기사의 일련의 행동이 이 전 차관의 '영상 삭제 부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 전 차관이 객관적으로 과하다고 볼만한 금액을 송금한 뒤 영상 삭제와 허위 진술을 요청한 점, 피해 기사가 영상이 있다는 사실을 경찰에 들키자 이를 이 전 차관에게 알린 점 등을 고려했습니다. 또 피해 기사가 "지우긴 뭘 지워요, 안 보여주면 되지"라고 말한 건 적어도 "증거를 숨기긴 하겠다"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봤습니다.

피해 기사가 자신의 거짓말이 들킬까 봐 조사 도중 영상을 지운 것이란 주장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만약 피해 기사에게 개인적인 다른 유인이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이 전 차관의 교사가 범행의 유일한 조건일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재판부는 "언론 유포를 막으려던 것일 뿐 증거 인멸은 아니다"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 전 차관의 경력을 들어 반박했습니다. 법률전문가인 이 전 차관이 정말 순수하게 언론 유포를 막으려고 부탁했던 거라면, 증거인멸교사로 처벌을 받을 위험을 피하면서도 목적을 달성할 다른 방법을 충분히 강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전 차관이 법원에서 부장판사와 사법연수원 교수까지 역임했고, 법무법인의 대표변호사와 법무부 법무실장까지 두루 역임했던 법률전문가였다"면서요.

재판부는 양형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목적지가 맞는지 확인하려고 기사가 잠시 차를 멈춘 상태에서 이 전 차관이 기사를 폭행한 건 교통사고를 유발해 제3자에게도 중대한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위험한 범행이라고 했습니다. 증거인멸까지 교사하면서 죄질도 더 불량해졌다고 덧붙였습니다. 다만 피해자로부터 용서를 받았고 피해가 중하지 않은 점, 교통사고 등의 추가 피해는 없었던 점 등을 고려했습니다. '나에게서만 삭제'가 형사사법작용에 위험성을 야기한 건 맞지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은 점 역시 참고했습니다.

 술에 취해 운전 중인 택시기사를 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용구 전 법무부 차관이 25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을 마치고 이동하고 있다. 뉴스1

술에 취해 운전 중인 택시기사를 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용구 전 법무부 차관이 25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을 마치고 이동하고 있다. 뉴스1

"영상 못 본 것으로 하겠다"? 수사 경찰관 무죄

최초 사건을 내사 종결해 함께 재판에 넘겨진 전직 경찰관 진모씨에 대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폭행 장면이 담긴 영상을 보고도 "못 본 것으로 하겠다"며 단순 폭행으로 내사결과 보고서를 작성해 특수직무유기 혐의 등을 받았는데요. 재판부는 무죄로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일부러 사건을 축소하려던 게 아니고, 단순 폭행을 적용할 사안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진씨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진씨 측은 "이 사건이 있기 전 비슷한 사안에 대해 운전자 폭행 혐의를 적용해 보고를 올렸더니, 상급자가 사건을 돌려보내 단순 폭행으로 처리해야 하는 줄 알았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요.

재판부 역시 "진씨가 무능하거나 불성실하게 사건을 처리한 건 맞다"라면서도, "운전자 폭행죄에 해당하는지 명백히 인식하지 못한 상황에서 성실하게 조치하지 않은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진씨가 '택시가 승객 하차를 위해 멈춘 이후에 운전자를 폭행할 경우 단순폭행이 적용된다'고 생각해 법리나 수사 관행을 잘못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재판부는 진씨의 잘못을 바로잡아주지 못한 직속 상관들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오롯이 진씨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라고도 밝혔습니다.

또 진씨가 사건을 축소해 처리하라는 지시를 받거나, 스스로 그런 마음을 먹었다고 볼 증거도 없다고 봤습니다. 진씨가 블랙박스 업체 사장을 수소문해 찾아낸 점, 실제로 영상을 확인한 점 등을 고려하면 진씨 나름대로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는 겁니다. 진씨가 피해 기사에게 "영상은 못 본 것으로 하겠다"라고 말한 것은 "영상과 진술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아 영상에 큰 의미가 없다"는 취지로 해석될 수 있다고 봤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