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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깨져 버린 바이든의 밀어(蜜語)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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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석 달 전, 햇살 가득한 서울 남산의 호텔 야외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정의선 현대차 회장에게 밀어(蜜語)를 속삭였다. "실망시키지 않겠다." 105억 달러 미국 현지 투자 약속에 대한 화답이었다. 그때 정 회장의 어깨에 얹었던 바이든의 손자국이 식기나 했을까. 그가 서명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으로 미국에서 팔리던 현대·기아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테슬라에 이어 미국 전기차 시장 점유율 2위(9%)까지 오른 현대차의 발목을 거는 강력한 태클이다. 냉전 이후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떠받쳐 왔던 '자유롭고 공정한 교역'이라는 환상이 다시 한번 깨졌다.

한국 전기차 제동 '인플레 감축법'
가치 동맹 저버린 미국 일방주의
미·중 선택 한국에 고민거리 던져

현대차가 대책으로 미국 조지아주에 지으려는 전기차 공장 준공을 앞당긴다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현지 허가 절차, 협력업체 구축, 국내 노조 설득 등 선행 과제가 한둘이 아니다. 모든 게 잘돼도 2년 넘게 걸린다. 그 사이 시장이 버틸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동차산업연합회(KAIA)는 IRA 시행에 따라 매년 10만대 규모의 전기차 수출에 차질이 생길 것으로 우려한다.

크고 작은 한·미 통상 현안은 다반사였지만, 이번 건은 가치 동맹으로서의 양국 관계가 재부상하는 시점에 나온 일이라 더 충격적이다. 가치는 공유할 수 있어도 이익은 공유할 수 없다는 말인가. 우리 정부와 업계는 '경제안보 동맹국'에 대한 배려를 바라는 눈치지만, 가능성이 높지 않다. 유럽·일본을 제쳐 두고 한국만 특별 대접할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자국 영토 안에 소재·부품·생산 등 제조업 기반 전체를 재구축하겠다는 게 미국의 장기적인 의도다. 어설픈 희망 대신 상호주의 원칙에 기반을 둔 현실적 대응책을 찾는 게 현명하다.

지난 5월 22일, 방한 중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서울 용산구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이야기하는 도중 정 회장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이 자리에서 정 회장은 총 105억 달러의 미국 현지 투자를 약속했다. 그러나 바이든은 최근 미국산 전기 자동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내용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했다. [현대자동차그룹 제공]

지난 5월 22일, 방한 중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서울 용산구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이야기하는 도중 정 회장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이 자리에서 정 회장은 총 105억 달러의 미국 현지 투자를 약속했다. 그러나 바이든은 최근 미국산 전기 자동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내용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했다. [현대자동차그룹 제공]

당장의 대응책 중 하나는 '한국만 봉이 됐다'는 전기차 보조금 체계부터 손보는 일이다. 한국산 자동차는 미국에서 한 푼의 보조금도 못 받게 됐지만, 미국산 자동차는 여전히 보조금을 받는다. 상반기 미국산 전기차에 지급된 정부 보조금(국비+지방비)은 448억원이었는데, 대부분 테슬라가 가져갔다. 전체 전기차 보조금의 10분의 1쯤 되는 금액이다. 대놓고 생산지를 따져 차별하는 미국과 비교하면 한국의 보조금 정책은 신사적이다 못해 한가하기까지 하다.

미국의 제조업 회귀 정책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10년 오바마 정부의 '제조업 증강법' 이후 도도한 흐름이다. 트럼프의 거친 '미국 우선주의'를 비난하고 당선된 바이든이지만, 달라진 건 없다. 오히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 뒤에 '아메리카 퍼스트'는 더 교묘해지고 독해졌다. 취임 닷새 만에 서명한 문서가 정부 조달품의 미국산 구매 의무를 강화하는 '바이 아메리카' 행정명령이었다. 미국에 투자하는 글로벌 업체에 파격적 보조금을 주는 대신 첨단 반도체의 중국 투자를 막는 반도체 육성법도 바이든의 심혈작이다.

미국 제조업 부흥책의 목적이 '국익'이라는 추상적 단어로 포장됐지만, 결국은 표다. 바이든은 당선 전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 기고에서 "앞으로 중산층을 위한 외교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세계화 이후 가속된 미국의 탈산업화의 흐름을 멈추고, 줄어든 노동자의 일자리를 되찾겠다는 것이다. 바이든의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 구호는 러스트벨트 노동자를 겨냥한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와 본질에서 다를 바 없다.

바이든의 서명은 국제관계의 평범하지만 냉정한 진리를 새삼 환기했다. 국익 앞에서 가치는 명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미국과의 '가치동맹'으로 외교 기수를 돌리던 중에 잠깐 잊고 있었던 명제이기도 하다. 반도체와 사드 등 우리 미래가 걸린 문제에서 두 강대국은 우리의 선택을 강요한다. 이 와중에 등장한 인플레 감축법은 그 선택의 결과까진 미국이 책임지지 않겠다는 사전 고백일지 모른다. 윤석열 정부 외교·통상 정책에 또 하나 생각할 거리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