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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인터넷이 허문 유럽중심주의 “서양의 편견 벗겨주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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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오리엔탈리즘의 어제와 오늘

김기협 역사학자

김기협 역사학자

튀르키예(Turkiye) 외무장관이 지난 5월 유엔 등 여러 국제기구에 보낸 공식 서한을 계기로 국제사회에서 ‘터키(Turkey)’란 국명이 사라졌다. 터키나 튀르키예나 모두 ‘튀르크인의 나라’라는 같은 뜻인데, 오스만제국이 공화국으로 바뀐 20세기에 영어의 힘이 셌기 때문에 영어식 이름 터키가 통용됐다.

오스만제국은 14~19세기에 중동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발칸반도까지 지배력을 펼친 대제국이었다. 유럽 전체를 포위한 형국이었고, 오랫동안 유럽인의 의식에 ‘타자(他者)’의 대표로 자리 잡고 있던 존재였다.

로마 때 싹튼 동방에 대한 우월감
19세기 오스만제국 퇴락에 힘받아

‘서방의 흥기’‘동방의 타락’ 강조
근대 유럽문명의 젖줄 부정한 꼴

사이드의 선도적 연구가 큰 역할
냉전 깨지며 ‘제3의 가치관’ 부상

키케로가 지키려 한 로마인의 씩씩함

1204년 콘스탄티 노플을 점령한 제4차 십자군 모습. 동로마제국은 여우(이슬람세력)를 쫓으려고 호랑이(갈리아인)를 불러들인 꼴이 됐다. [사진 위키피디아]

1204년 콘스탄티 노플을 점령한 제4차 십자군 모습. 동로마제국은 여우(이슬람세력)를 쫓으려고 호랑이(갈리아인)를 불러들인 꼴이 됐다. [사진 위키피디아]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1978)에서 지적한 ‘동방에 대한 편견’의 일차적 대상이 오스만제국이었다. 18세기 초까지 군사력·경제력·문화력 모든 방면에서 유럽을 압도하던 오스만제국이 차츰 경쟁 상대의 위치로 내려오는 데 따라 ‘서방의 흥기’와 대비되는 ‘동방의 타락’을 설파하는 담론으로 오리엔탈리즘이 자라난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

에드워드 사이드

동방의 퇴폐성과 나약함이 그 중요한 주제였다. 사이드는 그 기원을 로마시대에서 찾았다. 잭 터너가 『향료:어떤 유혹의 역사』에 소개한 키케로(서력전 106~서력전 43)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시라쿠사 참주 디오니시우스가 스파르타에 갔을 때 음식이 맛없다고 불평하자 요리사는 양념이 빠져서 그런 거라고 대꾸했다. 어떤 양념이 빠진 거냐고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사냥의 정직한 운동과 땀, 그리고 배고픔과 목마름, 그런 양념이 스파르타인의 음식에 들어갑니다.” (78쪽)

17세기 오스만제국의 전성기

17세기 오스만제국의 전성기

로마인의 씩씩한 기상을 지키고 향락 풍조를 막자는 것이 키케로의 뜻이었다. 로마 세력이 지중해를 장악하면서 동방의 풍요로운 물질문화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할 때였다. 한나라 문제(文帝)의 사신으로 흉노에 갔다가 투항한 중항열(中行說)이 흉노 선우에게 한 말도 같은 취지였다. “흉노가 강한 것은 입고 먹는 것이 한나라와 다르기 때문이며 그것을 한나라에 의존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선우께서 풍습을 바꿔 한나라 물자를 좋아하시게 되면 한나라에서 소비하는 물자의 10분의 2를 흉노에서 채 소비하기도 전에 흉노는 모두 한나라에 귀속되고 말 것입니다.”

키케로의 경각심은 로마의 향락 풍조를 막지 못했다. 콘스탄티노플로 중심을 옮긴 것은 경제적-문화적 풍요를 향한 이동이었고, 서로마제국은 더 씩씩한 기상의 게르만족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서유럽 지배층은 향료의 매력을 잊지 못했고 동로마제국을 통해 들어오는 소량의 향료는 보물 취급을 받았다.

동로마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연속성

프랑스 화가 앵그르의 ‘노예의 시중을 받는 오달리스크’(1842). 1717년경 이스탄불에서 지낸 영국 몬터규 부인의 글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알려졌다. [사진 위키피디아]

프랑스 화가 앵그르의 ‘노예의 시중을 받는 오달리스크’(1842). 1717년경 이스탄불에서 지낸 영국 몬터규 부인의 글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알려졌다. [사진 위키피디아]

오스만제국의 풍요는 동로마제국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오스만제국은 많은 의미에서 동로마제국의 계승자였다. 18세기 유럽인이 오스만제국을 바라본 시선은 십자군 시대에 동로마제국을 바라보던 눈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나일강과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출발한 초기 문명은 동쪽의 페르시아 방면과 서쪽의 지중해 방면으로 퍼져나갔다. 로마는 지중해를 제패한 후 사산제국(224~651)의 페르시아와 장기간 대치했다. ‘로마-페르시아 전쟁’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적대행위보다 문물 교류가 더 활발한 시기였고, 로마제국은 이 교류를 통해 향락 풍조를 키워나갔다.

몬터규 부인의 튀르키예 복장 초상. [사진 위키피디아]

몬터규 부인의 튀르키예 복장 초상. [사진 위키피디아]

이슬람이 동방을 휩쓴 후 동로마제국은 사산제국을 대하던 방식대로 동방의 칼리프조(朝)를 상대했다. 그러나 10세기부터 칼리프조의 지배력 붕괴에 따라 동방 형세가 불안해지다가 11세기 중엽 튀르크계 셀주크 세력의 급성장으로 위기를 맞으면서 십자군을 불러들였다.

두 세기에 걸친 십자군운동(1095~1291)은 유럽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큰 변화가 ‘동방’과의 만남이었다. 동로마제국을 통해 조금씩 맛봐 오던 동방의 풍요에 직접 마주치면서 유럽은 큰 경제적·문화적 자극을 받았다. 제4차 십자군이 1204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동로마제국을 해체한 것은 중개인의 역할을 더 원하지 않게 된 결과였다. 동로마제국 후예들이 1261년 콘스탄티노플을 되찾았으나 제국을 완전히 되살릴 수는 없었고, 튀르크 세력의 확장을 위한 공간이 넓혀져 오스만제국의 등장에 이르게 된다.

오스만제국이 동방교역로를 가로막았기 때문에 유럽인이 원양항해에 나서게 되었다는 통설은 통설일 뿐이다. 동방교역의 양상은 동로마제국 때나 오스만제국 때나 큰 변화가 없었다. 변한 것은 유럽의 향료 수요였다. 귀족계급의 형성으로 지배층이 확대되면서 ‘과시적 소비’의 풍조가 크게 일어난 것이다.

유럽중심주의의 끝이 보인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낸 15년 후인 1993년 『문화와 제국주의』 서문에서 말했다. “『오리엔탈리즘』에서 내 시야는 중동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그 책이 나온 후 인류학·역사학·지역학 등 여러 분야에서 내가 제시했던 주장들로부터 더 나아가는 많은 연구성과가 나왔다. 그래서 나 역시 근대 서양의 중심부와 그 해외영토 사이의 관계 양상을 더 넓게 바라보는 쪽으로 앞서 책의 주장들을 키우기 위해 이 책에서 노력했다.”

『오리엔탈리즘』 출간은 인문학 분야에서 ‘탈-유럽(서양)’ 변화의 계기가 됐다. 이 변화는 1993년 이후 더욱 크게 증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프랜시스 후쿠야마

냉전 해소와 인터넷 보급이 새로운 계기가 됐다. 냉전은 유럽에서 발생한 정치이념 사이의 대결이었고, 제3세계의 가치관은 그 밑에 파묻혀 있었다. 냉전 해소에서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1992)로 이념의 공백을 바라본 것은 서양의 근대이념만을 염두에 둔 관점이었지만, 헌팅턴은 근대 이념에 깔려 있던 다른 문명의 이념들이 제모습을 찾는 『문명의 충돌』(1996)을 내다봤다.

새뮤얼 헌팅턴

새뮤얼 헌팅턴

인터넷 보급으로 자료 접근과 학자 교류가 쉬워지면서 학술활동의 집중현상이 풀렸다. 종래에는 많은 자료와 연구자가 모여 있는 ‘세계적’ 연구기관이 아니면 1류 연구활동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이 제약이 완화되면서 ‘선진국’에서의 활동 경험이 적은 제3세계 학자들이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놓기 시작했다. 인도의 서발턴 그룹이 두드러진 예다.

연구기반의 확장이 가져온 가장 생산적인 효과는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나는 가치관의 다변화다. 각국 연구자들이 자기네 연구·교육기관에서 근대 유럽 가치관의 지배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세계관의 구축에 힘쓰게 됐고, 그중에서 ‘탈-근대’의 새로운 실마리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지금도 가속(加速) 중인 변화다.

영국 귀부인도 부러워한 ‘터키탕’

한국과 일본에서 ‘터키탕’이란 이름이 튀르키예 당국의 항의로 폐지된 일이 있다. 한국은 1996년 금지됐다. 함맘(Hammam), 즉 공중목욕탕 제도는 로마의 테르메(Thermae)를 이어받아 북아프리카에서 인도까지 이슬람권 전체에 퍼져 있었다.

이 건전한 풍속이 후세 엉뚱한 곳에서 ‘퇴폐영업’의 대명사가 된 것도 오리엔탈리즘의 편견 때문이다. 근대 유럽인이 상상한 이슬람 지배층의 무절제한 향락 현장으로 지목된 것이다.

1717년경 오스만제국 대사였던 남편을 따라 이스탄불에서 지낸 영국 몬터규 부인이 하맘의 분위기를 혐오하기는커녕 부러워하는 마음을 보여준 편지에는 그런 편견이 보이지 않았다. (존 캐리 편저 『역사의 원전』 287~289쪽)

“의자의 첫 단에는 쿠션과 두꺼운 양탄자가 깔려 귀부인들이 거기에 앉았고 둘째 단에는 하녀들이 주인 뒤에 앉아 있었지만 신분을 나타내는 복장의 차이는 없었다. 모두 천연 복장, 쉬운 말로 ‘홀랑 벗고’ 있었으니까. 어떤 아름다움도 어떤 결함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지만 점잖지 못한 미소나 부적절한 행동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 사려 깊어 보이는 한 부인이 나를 옆에 앉도록 청하고는 나도 옷을 벗고 함께 목욕하기 바란다고 했다. 너무들 열심히 권하는 바람에 사양하기가 꽤 힘들었다. 끝내는 치마를 열어 코르셋을 보여주니 모두들 납득했다. 내가 묶여 있는 그 장치는 내 손으로 열 수 없는 것이라고, 그 장치는 우리 남편이 설치해 놓은 것이라고 모두 믿었던 것이다.”

김기협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