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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은식이 고발한다

이대론 간호사 뇌출혈 사망 반복된다…'전문의 제도'의 함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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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신재민 기자

그래픽=신재민 기자

국내 최대 상급종합병원인 서울아산병원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간호사를 수술할 의사가 없어 다른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결국 사망한 안타까운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의사인력 부족, 필수의료분야의 저수가, 그리고 정부지원대책 부재 등을 원인으로 거론한 보도가 쏟아졌다. 그런데 정작 전문의 수련과정을 문제 삼는 기사는 보지 못했다.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서울아산병원에는 뇌와 척추 등 신경이 분포하는 모든 부위의 수술을 할 수 있다고 국가가 인정해 전문의 자격증을 준 신경외과 전문의가 25명이나 있다. 그런데 왜 뇌출혈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2명밖에 없다는 걸까? 답은 지나친 전문화다. 이제 지나치게 세부전문화된 수련제도와 진료체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때가 됐다.

25명 vs 2명  

중재시술=내시경 등을 통한 시각 정보를 활용해 특수 기구를 신체에 넣어 하는 시술. 신체를 절단하지 않고 작은 구멍을 내 처치한다.

중재시술=내시경 등을 통한 시각 정보를 활용해 특수 기구를 신체에 넣어 하는 시술. 신체를 절단하지 않고 작은 구멍을 내 처치한다.

과거 국내에선 의과대학만 졸업한 일반의가 모든 질환을 진료했다. 의료기술이 발달하고 방대한 지식이 축적되면서 우리나라도 선진국의 의료 시스템을 도입해 내과·신경외과 등으로 진료과를 나눴고, 전공의(레지던트) 수련 과정을 마친 의사에게 전문의 자격증을 줬다.

여기까지는 문제 삼을 게 없다. 그러나 전문 진료 추세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점점 더 좁은 범위로 나뉘면서 여러 부작용을 낳고 있다. 내과는 심장내과·소화기내과 등 10개의 세부 전문의(분과전문의, 펠로우, 전임의) 과정으로 나누고, 신경외과도 종양·혈관·정위기능·척추·소아로 나뉘었다. 심지어 소화기내과는 다시 또 상부장관·하부장관·간·췌담관로 나눈 후 해당 분야만 진료한다. 이러다간 특정 질환만 진료하는 세부-세부 전문의마저 나올 기세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수가는 낮고 의료 소송은 늘다 보니 소수의 숙련된 의사가 단시간에 많은 환자를 실수 없이 진료해야 하는 컨베이어벨트 같은 환경이 아니면 병원을 운영하기 어려워서다. 의대 교수 평가에 논문 비중이 커지면서 같은 질환 환자만을 모아 진료하게 된 것도 또 다른 원인이다.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에는 온갖 종류의 외과 수술을 하는 의사 주인공(한석규 분)이 등장한다. 현실에선 극히 보기 어려운 일이다. [사진 SBS 자료]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에는 온갖 종류의 외과 수술을 하는 의사 주인공(한석규 분)이 등장한다. 현실에선 극히 보기 어려운 일이다. [사진 SBS 자료]

그러다 보니 병원에선 전공의 교육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4년의 수련 기간 동안 전공의는 주요 수술 집도는커녕 병동환자 관리나 잡일에나 시달리느라 실제 할 줄 아는 '술기'(수술 기술)가 거의 없게 된다.

제대로 수술을 배우려면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의 세부 전문의 수련을 또 받아야 한다. 그렇게 세부 전문의 수련을 마치면 전공의 때 배운 다른 세부 전문과 지식은 오히려 잊어버린다. 결국 진료 가능한 의사가 세부 전문의로 나뉘면 나눠질수록 역설적으로 의사는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응급실에서 뇌출혈 수술 당직설 수 있는 의사가 줄어 이번 아산병원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부실한 전문의 수련제도는 그대로 두고 생명을 다루는 바이털과(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과) 지원자가 줄어드니 각 관련 학회는 유인책으로 전공의(레지던트) 수련 기간을 4년에서 3년으로 단축하는 추세다. 4년 해도 안 되는 걸 3년 해서 되겠나? 조삼모사일 뿐이다. 전공의 교육은 포기하고 세부 전문의 진료 및 교육체계로 가겠다는 거다. 게다가 부족한 전공의 인력을 대체하기 위해 몇몇 병원은 PA(전문간호사) 제도를 졸속으로 도입해 간호사가 의사 역할을 하는 불법까지 저지르고 있다.

지원 대신 방치하는 정부 

이런데도 정부는 전공의 수련 과정에 돈 한 푼 보태주지 않은 채 방치하고 있다. 그래선 안 된다. 정부는 전문의 자격증을 수여하는 주체이기에 수련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이제라도 적극적 지원을 통해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먼저 전공의 수련의 명확한 목표를 세워야 한다. 그 목표는 수련을 마치고 전문의 자격증을 받았을 때 응급실에서 가장 자주 맞닥뜨리는 중증 필수 수술이나 시술이라면 완벽하게 해내는 것이다. 쉽게 말해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제너럴리스트 양성에 초점을 두자는 거다.

이게 가능하려면 의과대학 교수들이 진료를 조금 덜 하고 그 시간을 교육에 쏟더라도 병원이 손해 보지 않도록 낮은 수가를 개선해야 한다. 미국의 10분의 1, 일본의 5분의 1 정도로 매겨진 중증 필수의료 수가를 책정해놓고는 의료의 질 향상을 외치는 건 공염불일 뿐이다. 수가 인상은 의사들만 배 불리는 게 아니다. 충분한 의료진을 확보하고 더 유능한 의료인을 양성하는 건 궁극적으로는 의료비용을 절감한다. 국민건강이 더 증진되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일어나는 의료사고에 대해 일정 부분 면책을 해주는 의료분쟁 특례법 제정이 필요하다. 그래야 의료진이 의료소송에 위축되지 않고 오로지 환자 생명만을 바라보고 소신껏 진료할 수 있다. 수련 받는 전공의도 숙련된 의사의 감독하에 집도 기회를 늘릴 수 있다.

번짓수 틀린 정원 늘리기  

지난번 아산병원 간호사 사건 이후 일부에서 제안한 해결책처럼 의대 정원을 늘리는 건 답이 아니다. 지금처럼 왜곡된 의료환경에서는 중증 필수분야 의료진이 늘어나기는커녕 비급여·저위험 분야에서 일하는 의료진만 늘어날 게 뻔하다. 그런 면에서 공공의대 또한 답이 아니다. 손놀림 하나에 사람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고 소송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하는 일을 억지로 시킬 수는 없다. 사명감으로 일하는 의사와 정부의 강제에 의해 일하는 의사가 만드는 결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중증 진료과의 열악한 여건에서도 우리나라의 급성기 질환 사망률은 OECD 평균을 크게 밑돌고 각종 의료 관련 지표도 상위권이다. 우리 의료진의 실력과 헌신을 방증하는 수치다. 현장 의료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무너져가는 바이털 진료를 재건한다면 모든 나라가 부러워하는 완벽에 가까운 의료체계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수련제도 개선에 국민적 관심이 이어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