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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리 상사 선거로 쫓아냈다…좌천됐던 한국계 女검사 역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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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미국 메릴랜드주에서 처음으로 아시아계 카운티(주 아래 행정단위) 검사장에 사실상 당선된 제이미 스털링 검사. 이달 초 애나폴리스에 있는 메릴랜드주지사 관저에서 그를 인터뷰했다. 사진 제이미 스털링

미국 메릴랜드주에서 처음으로 아시아계 카운티(주 아래 행정단위) 검사장에 사실상 당선된 제이미 스털링 검사. 이달 초 애나폴리스에 있는 메릴랜드주지사 관저에서 그를 인터뷰했다. 사진 제이미 스털링

“공직에 출마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냥 검사 일을 계속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미국 메릴랜드주의 첫 아시아계 카운티 검사장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쓴 제이미 스털링(42) 검사에게 출마 이유를 묻자 다소 소박한 답변이 돌아왔다.

스털링은 지난달 19일 메릴랜드주 세인트메리스 카운티(주 아래 행정단위) 검사장을 뽑기 위한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승리했다. 민주당 후보가 없어 11월 중간선거 본선에 가지 않고도 사실상 당선을 확정 지었다.

메릴랜드주는 주 법무장관과 23개 카운티 및 볼티모어시 검사장을 4년마다 선거로 뽑는다. 스털링은 주 역사상 첫 아시아계 카운티 검사장이자 세인트메리스카운티의 첫 여성, 첫 비(非)백인 검사장이 된다.

스털링은 한때 자신의 상사였던, 백인 남성 현직 검사장인 리처드 프리츠(76)를 꺾었다. 득표율은 스털링 70.89%, 프리츠 29.11%로 압도적 승리였다. 2020년까지 프리츠 검사장 바로 아래 ‘넘버 2’인 부(副) 검사장으로 일하다가 쫓겨난 스털링이 대역전극을 펼친 것이다.

이달 초 메릴랜드 주지사 관저에서 진행한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스털링은 ”재직 중에 검사장이 불법을 저지른 것을 알게 됐고, 이를 관계 당국에 보고했지만 아무런 후속 조치가 이뤄지지 않아 검사장은 자리를 지켰고 나는 한 직급 강등됐다"고 말했다.

스털링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의심스러운 공금 운용 및 인사 관행"이었다. 하지만 1998년부터 지금까지 24년간 검사장을 맡고 이번에 7선에 도전한 거물인 현직 검사장은 건재했다.

스털링은 “더는 그의 조직에 있을 수 없어” 사표를 냈고, “검사 일을 계속하고 싶어” 인근 앤아런델카운티 검찰로 옮겼다.

그가 사직서에 쓴 “나는 이 자리를 떠나야 할 윤리적, 도덕적 의무가 있다“, ”10년 가까이 주민을 위해 정의를 추구해온 것에 자부심을 가졌는데 이렇게 사퇴할 수밖에 없어 애석하다”는 글귀가 언론에 공개되면서 주목받았다.

스털링은 “우리 가족의 터전인 세인트메리스카운티에서 검사 일을 계속하고 싶었는데, 고향으로 돌아가 일할 수 있는 방법은 검사장 선거에 출마해 이기는 길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투표에서 주민들은 권력 비리를 고발했다가 좌천된 스털링 검사 손을 들어줬다.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현직 검사장을 표로 심판한 셈이다.

검찰 최고 책임자가 정당인이면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유지할 수 있을까. 스털링은 “미국 시스템의 본질은 투표의 힘은 매우 강력하고, 유권자가 최종 결정권을 가지며, 결국 어떻게든 동등해진다고 믿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스털링은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 진실하고 정직하게 일할 것을 약속한 공직 선서를 진지하게 실천하지 않으면 권력 남용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면서 “견제받지 않는 큰 권력은 매우 위험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면서 “검사 선서를 하면 항상 옳은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공직자의 선서와 의무는 개인에 앞선다”고 강조했다.

미국 메릴랜드주에서 처음으로 아시아계 운티(주 아래 행정단위) 검사장에 사실상 당선된 제이미 스털링(왼쪽) 검사가 메릴랜드 주지사 부인인 어머니 유미 호건 여사와 함께 했다. 사진 제이미 스털링

미국 메릴랜드주에서 처음으로 아시아계 운티(주 아래 행정단위) 검사장에 사실상 당선된 제이미 스털링(왼쪽) 검사가 메릴랜드 주지사 부인인 어머니 유미 호건 여사와 함께 했다. 사진 제이미 스털링

스털링 검사는 래리 호건 메릴랜드 주지사와 한국계 부인 유미 호건 여사 딸이다. 호건 여사가 전남편과 사이에 둔 세 딸 중 둘째. 스털링이 미시간대를 졸업한 뒤 메릴랜드대 로스쿨에 재학 중이던 2004년 호건 부부가 결혼했다.

주지사인 아버지 배경을 믿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걸까. 스털링은 “그런 이유로 사람들이 나를 더 믿어준 면도 있고, 내가 더 험한 보복을 안 당한 것일 수도 있다”고 일부 인정했다. 다만, 부모와 상의하지 않았고 “뉴스 보면 아시겠지만, 사직서를 냈다”고 통보했다고 한다.

스털링은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어머니는 가족도 친구도 없는 미국에서 자식을 키우기 위해 주 80시간씩 일하는 고된 삶을 살면서 우리에겐 약해져서 안 된다,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지 말고, 지금의 처지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기억했다.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20세 때 미국에 이민한 호건 여사는 이혼한 뒤 세 딸을 홀로 키웠다. 스털링은 “가족 휴가 한 번 못 갈 정도로 여유가 없는 어린 시절이었지만, 어머니는 내게 근면과 성실을 심어줬다”고 회상했다.

아르바이트와 학자금 대출로 학교를 마쳤고, 졸업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학자금 대출을 갚고 있다고 했다. 국립보건원(NIH)에서 실험 장비를 다루는 기사로 일하는 “블루칼라” 남편과 사이에 두 자녀를 뒀다.

주니어 올림픽 태권도 금메달, 텍사스주 챔피언십 태권도 은메달 2회, 카운티 배 소프트볼 최우수선수(MVP) 등으로 다진 체력이 무장강도, 마약, 살인 등을 다루는 검사 일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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