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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지영의 문화난장

‘송해 정신’을 이어가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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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지영 논설위원

이지영 논설위원

서울 낙원동 상록회 사무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한국원로연예인상록회’라고 적혀 있던 간판도 떼어진 상태였다. 지난 6월 8일 향년 95세로 세상을 떠난 송해 선생이 30여년 동안 매일 출퇴근한 사무실이었다. 선생의 단골집이었던 바로 아래층 고깃집에도 알리지 않고 상록회 사무실은 지난달 말 조용히 문을 닫았다.

수소문해 김명호 상록회장과 연락이 닿았다. 선생 타계 이후 회원 40여 명의 총회를 거쳐 신임회장으로 뽑혔다고 했다. 그도 사무실의 갑작스러운 폐쇄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모르고 있었다. 월세 등 사무실 운영비는 송해 선생이 자비로 부담해왔었다. ‘조 실장’으로 불렸던 상록회의 유일한 직원도 전화번호를 바꿨는지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선생이 세상에 없다는 게 새삼 실감 났다.

선생 타계후 사무실 폐쇄
체계적 기념사업 안갯속
초상권 등 잡음도 우려
“문화자산으로 키워가야”

송해 선생 타계 후 유족들이 유품 500여 점을 기증한 대구 달성군 송해기념관. 연합뉴스

송해 선생 타계 후 유족들이 유품 500여 점을 기증한 대구 달성군 송해기념관. 연합뉴스

원로 연예인 친목 모임인 상록회 사무실이 있던 건물은 지하철 종로3가역 5번 출구 앞에 있다. 송해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곳에 놓인 송해길 표지판과 선생의 흉상은 여전했다. 흉상 아래엔 그의 주제가 격인 ‘나팔꽃 인생’ 가사가 적혀 있었고, 그 곁을 주황색 나팔꽃이 지키고 있었다. 생전의 선생은 저녁에 졌다가도 아침이면 다시 활짝 피는 나팔꽃이 자신의 인생과 닮았다며 좋아했다.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난 선생이 ‘송해 정신’으로 다시 피어날 것이란 예시 같았다.

선생을 향한 추모 열기는 뜨거웠다. 하지만 선생의 유지를 어떻게 이을지를 놓고는 허둥대는 모습이다. 지난 3일 유족들로부터 1억원을 기부받은 대한민국방송코미디언협회가 그 기금으로 생계가 어려운 코미디언들을 돕겠다는 것 정도가 예정된 사업이다.

오경표 송해길보존회 이사장은 초상권 문제를 걱정했다. 송해길은 낙원상가 앞에서 종로2가 육의전 빌딩에 이르는 250m 구간이다. 2016년 종로구가 명예도로명으로 붙여준 이후 선생은 이 지역의 ‘얼굴’이 됐다. 송해길 곳곳 상가 간판에는 선생의 캐리커처가 붙어 있었다. 마이크를 든 모습, 주먹을 쥔 모습 등 그림 형태도 다양했다. 오 이사장은 “선생님 살아계실 때 상가마다 일대일로 허락받아 공짜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며 “보존회가 이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지 않은 상황이라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고 말했다.

지난달말 폐쇄된 서울 낙원동 상록회 사무실. 이지영 기자

지난달말 폐쇄된 서울 낙원동 상록회 사무실. 이지영 기자

송해공원과 송해기념관을 운영하는 대구 달성군도 기념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개관한 송해기념관은 선생 타계 이후 소장품이 두 배 넘게 늘었다. 세계 최고령 TV 음악 프로그램 진행자로 등재된 기네스 증서와 금관·은관·화관 등 3종의 문화훈장, 공연 의상과 시계·안경 등 유품 500여 점을 유족들로부터 기증받았다. 상록회 사무실에서 사용했던 책상과 책장도 기증품에 포함됐다. 100명 정도였던 하루 관람객 수가 600∼700명으로 늘고 선생의 캐릭터 상품 판매액도 월 700만원에서 3000만원으로 훌쩍 뛰었다. 하지만 그 이상 어떤 의미 있는 사업을 펼쳐야 할지에 대한 구상은 착수조차 못 한 듯했다.

선생은 존경받는 어른이 드문 우리 사회에서 세대를 초월한 지지를 끌어냈다. 재치와 순발력을 갖춘 진행 실력, 자신을 낮추는 리더십, 소탈하지만 권위를 잃지 않는 처세 등에 대중은 열광했다. 선생의 평전 『나는 딴따라다』를 쓴 오민석 단국대 교수는 ‘송해 정신’의 핵심으로 ‘문화적 민주주의’를 꼽았다. 학력·신분·재력·외모 등에 따른 위계에 상관없이 함께 어울려 희로애락을 나누는 평등한 무대를 구현했다는 것이다.

2016년부터 선생과 함께 ‘청춘은 바로 지금’(청바지) 등의 공연을 진행했던 낙원동 추억을파는극장 김은주 대표도 그 정신을 잇고 싶어했다. “선생님은 늘 서민들을 위한 공연을 하려고 하셨다”며 “한 달에 2∼4번은 대관료를 받지 않고 문턱 낮은 공연장으로 운영할 생각”이라고 했다. 하지만 김 대표가 지난달 26일 선생의 49재 추모 공연을 진행하면서 ‘낙상 방지 캠페인’을 벌인 데 대해선 유족들의 반발이 있었다. 유족들의 법률대리를 맡은 오승준 변호사는 “고인이 낙상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은 허위사실”이라며 “관련 행사는 유족들과 협의하면 좋겠다. 곧 유족들의 공식 입장과 협의 창구 등을 정리해서 밝힐 예정”이라고 전했다.

잡음 없이 선생의 뜻을 이어가려면 공신력 있는 법인 형태의 ‘송해기념사업회’가 필요해 보였다. 선생의 이름과 얼굴·목소리 등 퍼블리시티권을 지키는 일부터 "못 생기고 못 배워도 내 무대에서 난 멋진 주인공”이라는 가치관을 전파하는 일까지, 체계적으로 기념사업을 펼치기 위해서다. 그저 흘러간 옛 스타로 선생의 흔적이 흐려지기 전에 서둘러야 할 일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