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지켜보니 각본 없는 드라마 탄생”…자폐 음악가 비춘 영화 '녹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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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서울 서초구 한 카페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녹턴'의 주인공 은성호씨(가운데)와 손민서씨(왼쪽), 정관조 감독을 만났다. 자폐 장애인이지만, 피아노와 클라리넷 연주에 재능이 있는 성호씨는 무대에서 연주할 때 기분을 묻자 "힘들어도 참고 하는 느낌이다. 힘들어도 참아야 된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 22일 서울 서초구 한 카페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녹턴'의 주인공 은성호씨(가운데)와 손민서씨(왼쪽), 정관조 감독을 만났다. 자폐 장애인이지만, 피아노와 클라리넷 연주에 재능이 있는 성호씨는 무대에서 연주할 때 기분을 묻자 "힘들어도 참고 하는 느낌이다. 힘들어도 참아야 된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주변에서 제일 많이 들었던 얘기가 ‘너무 비효율적으로 일한다’는 거였어요. 그냥 찍어서 쌓아두고 있으니까 ‘이게 쓰이긴 하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는데, 저 스스로도 답을 알 수가 없었죠. 그렇지만 참고 인내하니까 결국 각본 없는 드라마가 탄생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난 18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녹턴’을 만든 정관조 감독의 말이다. 정 감독은 음악적 재능은 뛰어나지만, 자폐 장애를 지닌 은성호(38)씨와 그의 가족을 2008년부터 무려 11년 동안 촬영했다.

영화는 피아노와 클라리넷 연주에 능하지만, 머리도 혼자 감지 못할 정도로 일상생활은 어려운 성호씨와 그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어머니 손민서(65)씨, 그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비장애인 동생 건기(32)씨의 일상을 담았다. 2019년 제작을 마쳤고 2020년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다큐영화상을 수상 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국내 개봉은 최근에야 이뤄지게 됐다. 22일 서울 서초구 한 카페에서 손씨와 성호씨, 그리고 두 사람을 오랜 시간 지켜본 정 감독을 함께 만났다.

지난 18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녹턴' 포스터. 제목 '녹턴'은 손민서씨가 아들에게 쇼팽의 녹턴(야상곡) C# 단조를 "엄마 죽으면 들려 달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따왔다. 사진 시네마달

지난 18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녹턴' 포스터. 제목 '녹턴'은 손민서씨가 아들에게 쇼팽의 녹턴(야상곡) C# 단조를 "엄마 죽으면 들려 달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따왔다. 사진 시네마달

다큐멘터리 영화 '녹턴' 주인공 은성호(오른쪽)씨는 음악에 재능이 있고 100년 전 날짜도 척척 맞추는 천재성이 있지만, 지하철에서 다른 승객들에게 기웃거리는 등 타인과 의사소통이 어려운 자폐 장애를 가지고 있다. 사진 시네마달

다큐멘터리 영화 '녹턴' 주인공 은성호(오른쪽)씨는 음악에 재능이 있고 100년 전 날짜도 척척 맞추는 천재성이 있지만, 지하철에서 다른 승객들에게 기웃거리는 등 타인과 의사소통이 어려운 자폐 장애를 가지고 있다. 사진 시네마달

이들의 기나긴 동행은 2008년 정 감독이 방송 다큐 촬영차 성호씨를 찾으면서 시작됐다. 두 달에 한 편씩 휴먼 다큐를 찍던 정 감독은 유독 성호씨에게 “맑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일단 제가 은성호의 ‘우주 최강 팬’이었어요. 성호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무한히 마음이 비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그 매력을 사람들이 좀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들의 인연은 방송 촬영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정 감독은 성호씨 가족과 연락을 이어나가다 2013년부터 다시 이들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을 때 고등학생이던 건기씨는 성인이 됐고, 손씨의 머리는 하얗게 세기 시작한 때였다. 형에게 ‘올인’하는 엄마의 정성을 “부질없다”고 여기던 건기씨가 집을 나가 방황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때도 뚜렷한 목표는 없었고, 그저 제가 성호·건기를 워낙 좋아하니까 가끔 촬영하면서 같이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찍다 보니 2008년부터 영상이 있으니 긴 세월을 담아 영화로 만들면 좋은 다큐가 되지 않을까 싶었죠.”(정 감독)

영화 '녹턴'의 주인공 은성호씨(왼쪽)와 손민서씨(가운데), 정관조 감독은 11년에 걸친 촬영 기간을 지나 한 가족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 정 감독은 "외롭다는 생각이 들 때 '나한테는 성호랑 성호 어머님이 있었지'라는 생각을 하면 든든하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영화 '녹턴'의 주인공 은성호씨(왼쪽)와 손민서씨(가운데), 정관조 감독은 11년에 걸친 촬영 기간을 지나 한 가족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 정 감독은 "외롭다는 생각이 들 때 '나한테는 성호랑 성호 어머님이 있었지'라는 생각을 하면 든든하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찍히는 손씨조차 “이게 언젠가 영화가 되리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고 할 정도로 정 감독은 어떤 정해진 틀도 없이 그저 이들 가족 옆에서 오랜 시간 묵묵히 카메라를 들었다. 정 감독은 주변의 의구심에도 촬영을 이어나간 이유에 대해 “그렇게 찍는 게 다큐멘터리의 숙명이자 본질”이라며 “우리 인생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다가 무언가가 나오는 것처럼, 다큐멘터리도 그저 차곡차곡 기록해 놓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녹턴’은 온종일 형에게만 매달리는 엄마의 모습에 서운함과 답답함을 느끼는 동생 건기씨의 시선도 적나라하게 담아냄으로써 자폐 장애인을 다룬 기존 서사들과의 차별점을 확보했다. 형 못지않게 음악에 흥미가 있었지만, 결국 음악을 포기해야 했던 건기씨는 “형한테 쏟은 정성을 나한테 쏟았으면 어땠을까? 내가 되게 잘 됐을 수도 있잖아요”라고 항변하고, 형을 함께 보살피길 기대하는 엄마를 향해 “가족은 가족, 내 인생은 내 인생”이라고 선을 긋는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 우영우가 대변할 수 없는 수많은 장애인과 그들 가족의 삶이 있음을 다큐가 고스란히 보여주는 셈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녹턴'은 어머니의 보살핌을 독차지하는 자폐 장애인 형과 그와 갈등하는 동생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사진 시네마달

다큐멘터리 영화 '녹턴'은 어머니의 보살핌을 독차지하는 자폐 장애인 형과 그와 갈등하는 동생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사진 시네마달

영화 '녹턴' 속 은건기씨(왼쪽)와 은성호씨(오른쪽). 사진 시네마달

영화 '녹턴' 속 은건기씨(왼쪽)와 은성호씨(오른쪽). 사진 시네마달

하지만 영화는 내내 갈등하던 형제가 처음으로 엄마 없이 떠난 러시아 공연에서 음악을 매개로 서로 통하는 찰나의 순간을 비추면서 막을 내린다. 영화는 그것을 완전한 화해로 표현하진 않지만, 두 형제가 공존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을 보여준다. 정 감독은 “이 갈등이 언젠가 해결될 거라는, 어떤 조그만 틈이라도 서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엄마는 몰랐지만, 건기는 엄마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가득한 아이기 때문”이라며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기다리다 보면 나올 거라는 생각은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성호씨도 동생에 대해 “(건기가) 옛날에는 사춘기라 그랬다. 지금은 예뻐졌다”며 “러시아에서 도와준 고마운 동생”이라고 말했다.

정 감독은 11년의 시간이 담긴 ‘녹턴’이 자신에게 어떤 작품인지 묻자 “제가 가는 길에 가이드 역할을 해준 작품”이라고 했다. “성호 어머니는 어두운 밤하늘에 ‘음악’이라는 별 하나를 보면서 긴 세월을 헤쳐 오셨잖아요. 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 게 어려웠지만, 은성호가 들려주는 음악, 인간이 어떤 도리를 갖고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성호 어머니에게서 많이 배웠거든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좀 더 좋은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손씨는 “영화를 통해 성호가 음악 하는 친구라는 게 알려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이야기했다. “성호는 친구가 한 명도 없지만, 어릴 때부터 유독 음악에만 관심이 있었어요. 지하철에서는 사람들이 위아래로 훑어보는 등 곱지 않은 시선을 받지만, 무대에서는 연주복을 입고 박수를 받으면서 자기 존재를 나타내는 느낌이에요. 제가 떠나고 성호가 시설에서 살게 될 때, 음악이 없는 환경에서 이 아이가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되죠. 이렇게 영화나 매체를 통해 성호가 음악 하는 친구라는 게 알려져서, 시설에서 자유롭게 음악을 들을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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