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거? 상관없다, 쿨하니까"…中애국주의도 이렇게 뚫었다 [한·중 수교 3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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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난해까지 일본 브랜드 유니클로가 입점했던(오른쪽) 베이징 쇼핑가인 싼리툰 타이구리에 젠틀몬스터가 지난 4일 세계 최대 플래그십 매장(왼쪽)을 개장했다. K 마크를 뗀 초국적 마케팅으로 중국 패션 인플루언서를 모으고 있다. 신경진 기자

지난해까지 일본 브랜드 유니클로가 입점했던(오른쪽) 베이징 쇼핑가인 싼리툰 타이구리에 젠틀몬스터가 지난 4일 세계 최대 플래그십 매장(왼쪽)을 개장했다. K 마크를 뗀 초국적 마케팅으로 중국 패션 인플루언서를 모으고 있다. 신경진 기자

수교 30주년을 맞은 한·중 관계의 또 다른 복병은 애국주의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체계·칩4(반도체 공급망 협력 대화) 등도 난제이지만 중국 사회에서 주류가 된 애국주의 역시 양국 관계 개선을 가로막는 숨은 암초가 될 수 있다.

사드 보복이 벌어지기 전인 지난 2016년 1월 한국의 걸그룹 트와이스의 대만 출신 멤버 쯔위(중국명 저우쯔위·周子瑜) 사건이 터졌다. 대만 깃발을 흔든 방송 장면이 뒤늦게 문제 되자 소속사 연예인의 중국 활동이 금지됐다.

같은 해 7월 12일 국제 상설중재재판소의 남중국해 영유권 판결에서 중국이 패소하자 중국 SNS가 들끓었다. ‘#중국은 점 하나도 뺄 수 없다(中國一點都不能少)’는 해시태그를 관영 인민일보가 이른바 남중국해 9단선을 표기한 중국 지도와 함께 퍼뜨렸다. 22일까지 누적 99억4000만 클릭을 기록 중이다. 대만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SNS를 도배한다.

지난 2016년 남중국해 영유권 판결 패소 당시 중국 인민일보가 만든 애국주의 중국 지도 포스터이다. 이달 22일 현재 총 99억4000만 클릭을 기록 중이다. 웨이보 캡처

지난 2016년 남중국해 영유권 판결 패소 당시 중국 인민일보가 만든 애국주의 중국 지도 포스터이다. 이달 22일 현재 총 99억4000만 클릭을 기록 중이다. 웨이보 캡처

관이 불을 지피는 애국주의는 ‘궈차오(國潮)’로 불리는 애국주의 소비로 이어진다. 중국인 비하 논란에 휩싸였던 돌체앤가바나, 신장 면화 보이콧과 연관됐던 나이키·아디다스, 중국 전통 의류 디자인 모방 논란의 디오르까지 피해 사례를 한 손에 꼽기 어려울 정도다.

중국에서 기세를 떨치고 있는 애국주의를 상대할 방법은 국적을 부각했던 그간의 ‘K 마케팅’을 벗어나 지구촌 젊은이, 소비자들의 보편적 욕구에 부응하는 실력 마케팅이라고 한·중 관계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지난 14일 베이징의 대표적인 쇼핑몰인 싼리툰 타이구리에 입점한 젠틀몬스터 매장에 들어가려는 시민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신경진 기자

지난 14일 베이징의 대표적인 쇼핑몰인 싼리툰 타이구리에 입점한 젠틀몬스터 매장에 들어가려는 시민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신경진 기자

베이징 랜드마크 들어선 ‘탈K’ 마케팅 

“디자인이 쿨하잖아요. 국적은 상관없어요.”
지난 19일 베이징 젊음의 거리인 싼리툰(三里屯) 타이구리(太古里) 초입의 젠틀몬스터(GM) 매장. 이곳에서 만난 대학생 왕(王)씨가 이같이 말했다. 제품의 국적은 소유욕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한국 토종 안경 브랜드인 젠틀몬스터가 지난 4일 세계 최대 플래그십 매장을 이곳에 개장했다. 1층부터 3층까지 1330㎡를 ‘데이터화 된 미래’라는 스토리로 꾸몄다. 개장과 동시에 왕훙(網紅·인플루언서)의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2층에 전시된 블랙핑크 멤버인 제니 콜렉션을 빼면 한국 브랜드임을 알기 힘들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젠틀몬스터는 사드 배치가 논의되던 2016년 5월 중국에 진출했다. 지난해 중국 수출액은 5606만 달러. 1년 만에 238% 늘어난 수치다. 왕샤오둥(王曉東) GM 중국 대표(CEO)는 “단일 상품 가치만 가지고 소비자 설득이 어렵다”며 “감정을 어떻게 건드리느냐가 최근 중국 오프라인 매장의 핵심 전장(戰場)”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8일 베이징의 럭셔리 백화점인 SKP-S 1층 입구에 마련된 '미래농장' 전시공간. 한국 안경브랜드 젠틀몬스터는 SKP 백화점과 손잡고 전층 디스플레이를 대행하고 있다. 신경진 기자

지난 8일 베이징의 럭셔리 백화점인 SKP-S 1층 입구에 마련된 '미래농장' 전시공간. 한국 안경브랜드 젠틀몬스터는 SKP 백화점과 손잡고 전층 디스플레이를 대행하고 있다. 신경진 기자

싼리툰의 타이구리 쇼핑몰엔 지난해 12월 베이커리 B&C(버터풀앤크리멀러스)도 매장을 열었다. 입점 직후 손님이 몰리면서 대기 줄이 길어지자 앞서 줄을 서서 사놓고 이를 되파는 암거래상이 등장할 정도로 인기다. 주말이던 지난 14일 저녁 “솔드아웃(매진)” 안내판에 실망하면서도 인증샷을 찍는 커플이 여럿 보였다. 이 업체는 압구정 로데오거리 등에 매장이 있는 한국 업체인데 현지에선 국적 마케팅은 하지 않는다. 중국의 온라인 소비자 매체 ‘브랜드 N’은 B&C가 인기를 얻은 이유로 희소성, 디자인, 맛·품질과 비교할 때 높은 가성비, 인플루언서 효과를 꼽았다. 모두 중국 신세대가 좋아하는 요소다.

지난 14일 오후 베이징 싼리툰 타이구리 쇼핑몰에 입점한 B&C(버터풀앤크리멀러스) 매장 앞에서 중국 젊은 여성이 사진을 찍고 있다. 신경진 기자

지난 14일 오후 베이징 싼리툰 타이구리 쇼핑몰에 입점한 B&C(버터풀앤크리멀러스) 매장 앞에서 중국 젊은 여성이 사진을 찍고 있다. 신경진 기자

온대성 재중국 한국외식협회 회장은 “기존 한식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치킨·베이커리·떡볶이 등 참신한 메뉴를 개발해 혁신과 고급화에 나선다면 중국 외식 시장은 여전히 기회의 땅”이라고 말했다. 우진훈 베이징 외대 국제상학원 교수는 “국가를 앞세운 ‘K 마케팅’ 대신 혁신을 앞세운 초국적 브랜드가 과거 한류를 대체하는 분위기”라며 “품질로 신뢰를 쌓는다면 당국의 압박에도 중국 소비자의 꾸준한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품질에서 초격차로 경쟁력을 보여주고, 초국적 마케팅으로 고객의 마음을 얻는다면 중국 시장을 공략할 수 있다는 의미다.

과거 서구 열강에 나라가 침탈당했던 경험이 있는 중국이 한국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경계를 풀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백분 활용해야 한다는 조언도 있다. 정종호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일반 중국인이 미국·일본·영국 등 서구에 품고 있는 경계심과 피해의식이 한국에는 상대적으로 약하다”며 “이러한 ‘상대적 우호성’은 한국이 키워야 할 소중한 자산”이라고 지적했다. 추리사(邱麗莎) 인민대 박사과정생은 “중국 정부와 민간이 한국을 보는 시각은 같지 않다”며 “한국의 정치 지도자가 중국 민간에 우호적이라는 인상을 심어 준다면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더 올라갈 수 있다”고 말했다.  정재호 주중 대사가 “중국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우호 공정’에 나서겠다”고 알린 게 비슷한 맥락이다.

“중국 국민 마음 향한 우호 공정”

이는 검열을 거친 중국 SNS나 관영 매체에 가린 14억 중국의 마음에 다가가는 매력 외교가 필요하다는 제안으로 이어진다.

한국은 하반기 출범할 시진핑(習近平) 3기 외교 구도에서도 나름의 위상이 있다. 중국 싱크탱크인 현대국제관계연구원의 천샹양(陳向陽) 연구원은 “한국은 중국 주변에서 모범[典範·전범]적 의미를 갖춘 국가”라며 “한국과 신형 동반자 관계를 맺는 데 성공해야만 중국이 국정(國情)·정치제도·안보체계가 다른 나라와도 파트너십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이론과 실천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학술지 『현대국제관계』 최신호에서 강조했다. ‘미국식 모델’의 우등생인 한국을 미래 ‘중국식 모델’의 모범생으로 포용하고 싶다는 중국의 속내를 드러냈다.

지난 19일 베이징의 중국 외문국에서 열린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행사에서 닝푸쿠이 전 주한 중국대사가 양국 미래 협력 방안을 담은 축사를 하고 있다. 신경진 기자

지난 19일 베이징의 중국 외문국에서 열린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행사에서 닝푸쿠이 전 주한 중국대사가 양국 미래 협력 방안을 담은 축사를 하고 있다. 신경진 기자

수교 30년을 맞아 양국은 눈부신 경제적 확장에도 불구하고 민감 현안에선 서로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한국 국민의 대중 정서 역시 수교 이래 최악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갈등 속에서도 서로 윈윈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만큼 민간을 상대하는 공공외교는 지속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한·중 신세대 얼굴 맞댈 기회를”  

지난 19일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외문국 주최 수교 행사에서 닝푸쿠이(寧賦魁) 전 주한 중국대사는 “한·중은 지난 30년간 서로 다른 정치제도·발전모델·가치관을 초월해 공동의 발전과 복지에 초점을 맞춰왔다”며 “앞으로는 공공외교를 통해 민간과 문화 분야에서의 분쟁과 마찰을 관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종호 서울대 교수는 “한·중 미래 세대가 온라인에서 나와 서로 얼굴을 맞댈 수 있도록 대규모 교류 프로그램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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