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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세 모녀는 1원도 못 받고 떠났다…韓복지 뼈아픈 맹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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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 22일 찾은 경기도 수원시 권선동 한 다가구주택. 전날(21일) 세 모녀로 추정되는 시신 3구가 발견됐다. 초인종 위에는 가스검침원의 연락달라는 메모가 붙어 있다. 채혜선 기자

지난 22일 찾은 경기도 수원시 권선동 한 다가구주택. 전날(21일) 세 모녀로 추정되는 시신 3구가 발견됐다. 초인종 위에는 가스검침원의 연락달라는 메모가 붙어 있다. 채혜선 기자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한국은 복지 투자를 두 배로 늘렸다. 복지 예산이 106조원에서 올해 217조원(중앙정부 기준)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건강보험 지출도 62조원에서 93조원으로 1.5배가 됐다. 하지만 사건 재발을 막겠다고 선전했지만 수원 세 모녀 사건을 막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의 '맞춤형 복지', 문재인 정부의 '포용 복지'를 비웃듯 피해갔다. 윤석열 정부는 '약자 복지'를 주창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한계를 극복할지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69세 여성 A씨는 난소암, 49세 큰 딸은 희귀병을 앓았다. 42세 둘째 딸도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소득은 0원이었고, 건강보험료는 지역가입자 최소보험료에 가까웠다. 이마저도 16개월 연체됐다. 게다가 2019년 아들이 병으로 숨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도 세상을 떠났다. 이 사실만으로도 세 모녀 가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가구였다.

 정부는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복지예산만 늘린 게 아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긴급복지지원법을 개정하고 사회보장급여법을 만들어 사각지대 발굴과 종합대책을 추진했다. 기초생보제를 개인 특성에 맞게 맞춤형 급여로 바꾸고, 긴급 복지 요건을 완화했다. 사회보장급여법을 근거로 복지 사각지대 발굴체계를 가동했다. 18개 정부 기관에서 34개의 정보를 받아서 상시적으로 위기 가구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이런 노력을 했지만 건보료 체납 정보만 레이더에 걸렸다. 한 가지만 포착되다 보니 중앙정부에서 지자체로 내려보내는 위기 가능성이 큰 집중조사 대상 가구(18만명)에 들지 못했다. 이렇게 1차 관리망에서 빠져나갔다. 세 모녀의 주소지는 경기도 화성시이다. 화성시 공무원은 지난3일 그 집을 방문하고도 행방을 확인하지 못했다. A씨 등의 기존 연락처와 우편 등을 통해 접촉을 시도했지만, 연결되지 않았고 회신을 받는 데 실패했다. 2차 관리망에서 빠져나갔다. 수원시에는 전입신고를 하지 않아 세 모녀는 '그림자 가구'가 됐다. 세 가구원 모두 중병에다 건보료 1년 4개월 연체만으로도 충분히 위기를 직감할 수 있는데도 어디에서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 보건복지부는 뒤늦게 34개 위기 정보 중 한 가지만 걸려도 연체기간이 길면 위기 가능 가구에 포함하는 방안 등을 마련하겠다고 나섰다.

 지금까지 드러난 정보를 종합하면 세 모녀는 빚 독촉에 쫓겨 외부 노출을 극히 꺼려한 것으로 짐작된다. 기초수급자나 긴급복지 지원, 법정장애인 등록, 의료비 지원 등의 각종 복지제도 어디에도 손을 내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노대명 한국사회보장정보원 원장은 "세 모녀가 생필품을 구매하고 전화를 사용하는 등 이 같은 일상생활의 흔적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흩어진 데이터를 신속하게 연계해야 한다"며 "빚 때문에 겁에 질렸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예방하고, 추적 관리하고, 신속히 발견하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한다. 위기가구 발굴의 근거 법령은 사회보장급여법이다. 노 원장은 "흩어진 개인 정보를 묶어야 위험도를 포착할 수 있다. 정보가 없는 게 아니다. 그동안 수없이 정보통합의 중요성을 주장해 왔으나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리하려면 사회보장급여법· 개인정보보호법 등을 이번 기회에 손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원 세 모녀의 경우 건보공단이 보유한 질병 정보를 연계했다면 위기 가구로 분류했을 수도 있다.

 한국은 지난 10년간 유럽의 좋다는 복지는 다 가져다 베꼈다. 없는 게 거의 없다. 단지 얕게 보장할 뿐이다. 이마저도 신청주의에 묶여 있다. 복지의 근간은 기초생활보장제이다. 기초수급자가 되려고 해도 본인이 신청하지 않으면 하나도 지원을 받을 수 없다. 수원 세 모녀처럼 빚쟁이에 쫓겨 신청하지 않으면 '제 3의 세 모녀 사건'을 피할 길이 없다. 노대명 원장은 "신청주의를 넘어서는 게 세계적인 추세이다. 신청하지 않아도 국세청·사회보장청에서 기준선 이하에 속하는 사람을 찾아서 (수당이나 서비스를) 지급한다"며 "프랑스가 그렇다"고 말한다.

2014년 2월 서울 송파구의 한 단독주택 지하1층에서 생활고를 비관한 모녀 셋이 박모(60·여)씨와 그의 두 딸 A(35)씨, B(32)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사진은 숨진 세 모녀가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 이라는 메모와 함께 남긴 현금봉투. 연합뉴스

2014년 2월 서울 송파구의 한 단독주택 지하1층에서 생활고를 비관한 모녀 셋이 박모(60·여)씨와 그의 두 딸 A(35)씨, B(32)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사진은 숨진 세 모녀가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 이라는 메모와 함께 남긴 현금봉투. 연합뉴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이번 사건의 경우 기존 복지제도로는 커버할 수 없는 새로운 유형의 복지 사각지대가 등장한 것”이라며 “가계 부채가 증가하고 가족 관계가 느슨해지는 상황에서 대도시에서 그림자처럼 사는 빈민은 갈수록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얼마나 많은 그림자 빈민이 있을지 추정조차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은 사회보장시스템에 위기가구로 등록되더라도 담당 공무원이 찾아가보고 대상자를 찾지 못하면 ‘복지 비대상자’로 등록하면 끝나는데, 끝까지 찾도록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광역지자체마다 독일의 ‘사회적 탐정’ 같은 탐을 꾸려 대상자가 주소지에 살지 않을 경우 경찰과 공조해 찾아내고,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위원장은 “이번 사건은 본인이 스스로 사회적 관계를 단절한 채 은둔하면서 주민등록을 기준으로 지원하는 기존 복지 행정망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사례”라며 “지역주민이 참여해 이웃을 살피고 신고하는 복지 사각지대 발굴 체계가 절실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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