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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세계경제전망

당분간 달러 강세 흐름 꺾을 통화 어디에도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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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강달러에 비친 세계 경제의 부침

김동호 논설위원

김동호 논설위원

세계 경제의 부침(浮沈)이 강(强)달러에 비치고 있다. 미국의 달러 값이 요동치는 것 자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세계 경제가 급변할 때는 언제나 달러 수요가 급증했다. 안전자산으로의 대피현상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양상이 다르다. 부자 나라들의 통화, 유로화와 엔화조차 달러 앞에서 추풍낙엽이다. 최근 강 달러 현상의 본질은 무엇일까.

유로·엔화는 경제 체력 고갈 반영 #중국은 성장 둔화로 위안화 약세 #위기 때마다 달러 강해지는 역설 #경쟁력 약하면 달러에 늘 휘둘려

노벨 경제학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뉴욕타임스(NYT)에서 “유로화 약세는 활력을 잃은 유럽 경제를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 경제는 지금 최악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형국이다. 코로나19 충격의 직격탄을 맞고 재작년부터 성장률이 곤두박질쳤다. 올해 들어 조금 회복하나 싶더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또다시 휘청거리고 있다. 그 바로미터이자 외부로 나타난 증상이 바로 달러화에 대한 유로화 환율의 약세다.
 유로화는 미 달러화보다 줄곧 강세를 띠는 경향을 보여왔다. 한때 1유로당 1.6달러에 이르기도 했지만, 7월 초부터 유로-달러 환율의 마지노선이라고 여겨졌던 1대 1이 무너져 유로당 0.99 달러까지 하락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1999년 1월 1일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럽 국가들(유로존)의 단일통화로 유로가 출범한 첫날, 유로환율은 1.17달러였다. 이후 유로는 2008년 미국이 리먼 브러더스 파산을 비롯한 금융부실 사태로 휘청거리자 1.6달러에 육박할 만큼 달러에 대해 강세를 보였다. 하지만 유로는 지난해부터 맥을 추지 못하고 있다. 표면적 계기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여기에 미국의 급격한 금리 인상이 결정타가 됐다고 볼 수 있다.

100달러짜리 지폐 다발. '화폐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사진 셔터스톡]

100달러짜리 지폐 다발. '화폐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사진 셔터스톡]

독재국가에 의존한 유럽, 경쟁력 잃어
 이 여파로 환율이 일시적으로 왜곡될 수 있다. 하지만 크루그먼은 “이번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면서 흥미로운 분석을 제시했다. 안이하게 독재국가에 의존한 경제 성장 모델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즉 에너지는 러시아에, 수출은 중국에 의존해온 결과 유럽이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는 의미다. 유럽은 지난 30년 탈원전 바람이 휩쓸면서 러시아의 화석연료 수입을 크게 늘렸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러시아가 가스관을 걸어 잠그자 에너지 위기에 직면했다.
 세계의 공장이던 중국 경제의 성장률이 둔화한 것도 유럽 경제를 급속 냉동시키고 있다. 독일 입장에서 중국은 황금알을 낳는 거대시장이었다. 자동차를 비롯해 공산품 수출의 효자였다. 16년간 집권한 메르켈 총리 시절 중국과 밀월을 즐긴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중국 경제가 둔화하면서 유럽 주요국은 거대한 시장을 서서히 잃고 있다. 크루그먼은 이런 이유를 들어 이번에 유로화가 약세를 보이는 것은 미국의 금리 인상에 따른 일시적 환율 변동 때문만은 아니라고 진단하고 있다.
 그 이유를 제시하기 위해 크루그먼은 독일 출신 미국 경제학자인 루디거 돈부시(1942~2002년) MIT대 교수의 저명한 논문 『환율에 대한 기대와 환율 역학』을 소환했다. 이 논문은 환율 이론의 바이블이라고 불릴 만큼 경제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크루그먼은 이 논문이 국제 거시경제학의 결정판이라고 칭송하고 있을 정도다. 돈부시가 뭐라고 했길래 이런 칭송을 듣는 걸까. 돈부시는 “환율은 결국 펀더멘털에 의해 결정된다”고 통찰했다. 환율이 일시적으로는 출렁거려도 모든 통화는 자국의 경제력만큼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의미다. 결국 환율은 각국이 만들어내는 생산품의 경쟁력이 세계 시장에서 평가받는 수준에서 결정된다는 얘기다.

원 달러 환율 추이

원 달러 환율 추이

한국은 원자력·반도체 초격차 필요
 이런 점에서 유럽 경제의 미래는 밝지 않다. 최근 유로화 약세는 투자자들이 이런 상황을 훤히 꿰뚫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크루그먼은 유럽 주요국이 이런 상황에 직면한 것은 결국 언제 180도 바뀔지 모를 독재자들에게 의존한 값비싼 대가라고 지적했다. 크루그먼의 분석이 맞는다면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에 급격한 탈원전은 자해나 다름없는 정책이다.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를 줄이는 것은 발등에 떨어진 과제다. 반도체 초격차 기술 유지는 두말할 것도 없다.
 요컨대 유럽은 러시아와 중국 경제의 수렁에 빠져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러시아에 파이프라인을 연결해 탈원전에 나선 것이 최악의 패착이었고, 중국 시장에 의존해 성장한 결과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있다. 그나마 독일은 제조업이라도 있지만 다른 유럽국에는 이렇다 할만한 제조업은 물론이고 글로벌 플랫폼 및 테크 기업을 찾아볼 수 없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금리를 올리면 환율 하락 속도를 막겠지만, 이탈리아·그리스 등 재정난을 겪는 남유럽 국가 때문에 그럴 수도 없는 처지”라고 분석했다.

경쟁력 떨어진 일본 엔화 콧대 꺾여
 일본 엔화도 처지가 다르지 않다. 한때 달러당 100엔 아래까지 가치가 치솟았던 엔화는 올해 들어 140엔에 육박할 만큼 콧대가 꺾였다. 돈부시의 환율 이론대로라면 엔화 약세는 ‘잃어버린 30년’의 현실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과 비교해도 일본 엔화는 약세를 보인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100엔당 1600원까지 치솟았던 원-엔 환율은 지금 900원대 후반에 머물고 있다. 돈부시의 환율 이론이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경우다. 물가와 환율을 반영한 구매력평가(PPP)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이미 2018년 한국(4만3001달러)이 일본(4만2725달러)을 추월했다. 2027년에는 1인당 명목 GDP 자체가 일본을 추월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최근 엔화 약세는 일시적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세계 경제가 흔들릴 때마다 달러와 함께 엔화로 돈이 몰리던 엔고(高) 현상이 자취를 감췄다. 유럽과 마찬가지로 일본 경제의 경쟁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일본 기업들이 원천기술에는 앞서 있지만,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혁신에 성공한 기업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더구나 일본 기업은 엔고를 피해 해외에 공장을 대거 옮기는 바람에 엔화가 약세를 보여도 수출 증대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루디거 돈부시

루디거 돈부시

일단 금리 인상 멈출 때까지 버텨야
 원화 가치는 달러당 1345원까지 곤두박질치고 있다. 돈부시의 이론대로라면 한국도 일본·독일·영국처럼 경쟁력의 시험대를 피할 수 없다. 올해 들어 5개월 연속 불어나는 무역적자를 줄이지 못하면 강달러 태풍을 피하기 어려워진다. 블룸버그는 “당분간은 달러의 독주를 막을 경제적 변수는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인플레이션 진화를 위해 올해부터 시작된 금리 인상 행진이 내년에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미 연방준비제도(Fed) 전문가들은 2024년에 접어들어야 금리 인상 행진이 멈춰설 것으로 보고 있다.
 강달러는 미국의 공식적 대외 통화정책이다. 미국은 1992년 빌 클린턴 정부 이후 기축통화로서의 위상과 통화 패권을 위해 강달러 정책을 취해왔다. 하지만 달러는 사실 서서히 힘을 잃고 있었다. 중국 경제의 급부상으로 미국 경제가 예전만 못하면서 달러의 위력도 약화했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달러 패권에 구멍이 뚫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러시아와 중국이 밀착해 달러를 배제한 채 위안과 루블로 무역 대금을 결제하는 비중을 늘리면서다. 여기에 인도까지 러시아 편에 서면서 달러 없이도 이들 3개국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달러 중심의 국제송금시스템(스위프트)에서 러시아를 배제했지만, 러시아가 버티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들 국가를 제외하면 달러의 힘은 더욱 막강해지고 있다. 달러에 대한 글로벌 수요는 2015년 이후 7년 만에 가장 강력해지고 있다. 이런 아이러니는 전쟁이나 금융위기로 경제가 어려워지면 폭증하는 달러 수요 때문이다. 러시아가 2014년 크림반도 침공 이후 미국의 제재를 받았을 때도 달러 부족 때문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침공 전에는 달러부터 확보하고 나섰다. 중국이 덩치를 키우면서 미국의 힘이 예전만 못하지만 달러의 위력은 여전하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