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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수인의 교육벤처

유치원에서 배워야 했을 것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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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수인 에누마 대표

이수인 에누마 대표

지난달에 아이들의 취학연령을 앞당겨서 만 5세에 초등학교를 입학하게 하려는 학제개편안이 발표되었다가 각계의 반대로 무산되면서 교육부 장관이 사임하는 일이 벌어졌다. “입직 연령을 앞당겨서 생산성을 높이고 출산율을 끌어 올린다”라는 정책 목표에 공감이 어려웠지만 “교사들의 부담이 심하다” “돌봄시스템이 필요하다” “선행 교육에 대한 부담이 더 커질 수 있다”라는 반론도 그리 희망적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입학 연령에 온 관심이 집중되고 끝났지만 정작 필요했던 건 어떻게 지금보다 더 안전하고 행복한 학교를 만들고, 입시 중심 교육과 과도한 선행학습의 악영향을 줄이고, 교육 양극화의 영향으로 뒤떨어지는 아이들을 잘 챙기고, 변화하는 미래를 더 잘 준비할 수 있기 위한 방안을 나누는 사회적 대화가 아니었을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필요한 ‘21세기 핵심 역량’을 정의했는데, 기본적인 학업 역량 외에도 정보통신기술의 활용과 경력개발 역량, 그리고 학습과 혁신 역량을 중요하게 꼽는다. 특히 학습과 혁신 역량에서는 학습 성취도가 아니라 의사소통능력, 협업 능력, 비판적 사고력, 창의력 네 가지의 자질을 강조한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는 문제 해결 역량을 키워주지 못한다면 입학 연령이 7세이든 8세이든 입시가 어떻게 바뀌든 간에 국가경쟁력을 높이고 미래의 세계를 살아가는 데 충분한 힘을 키우기 어려울 것이다.

21세기에 부족한 역량은 사회성
지식 중심의 교육정책 버리고
좋은 삶을 위한 공감력 키워야

갓난아이와 부모를 교실에 초대해 어린이들의 공감 능력을 키우는 프로그램인 ‘공감의 뿌리’ 수업 모습. [사진 ‘공감의 뿌리’ 홈페이지]

갓난아이와 부모를 교실에 초대해 어린이들의 공감 능력을 키우는 프로그램인 ‘공감의 뿌리’ 수업 모습. [사진 ‘공감의 뿌리’ 홈페이지]

아이들이 미래에 좋은 삶을 살게 돕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교육 전환 논의가 왜 이렇게 어려울까. 필자는 지난 10년간 교육에 IT 기술을 사용하는 사업을 위해 전 세계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교육에 대해서는 누구나 분명한 의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기성세대들이 참고하는 것은 몇십년 전 자신이 받은 교육의 기억이다.

특히 학창 시절에 공부를 잘했던 이들일수록 자기 경험에 비춰 암기 위주 학습과 경쟁을 긍정적으로 회고하고, 학습이 어려운 학생들의 다양한 사정이나 변화한 교실의 현실을 잘 상상하지 못한다. 21세기에 태어난 아이들은 더는 지식을 외우고 손으로 문제를 풀 필요가 없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와 새로운 도구가 생겨나는 상황에서 계속해서 배우는 능력,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그리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여럿이 협력해서 함께 풀어가는 능력이다.

수많은 학습 교재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신 골목과 공동체가 사라진 현대 사회에서 학교의 첫 번째 역할은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세상과 관계를 맺는 연습을 하는 공간이 되었다. 타인의 상황에 자신을 놓고 생각하면서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 즉 도덕적 상상력, 공감, 이해, 양보 등의 사회적 능력은 지적 능력이 자란다고 당연하게 함께 자라거나 나이가 든다고 절로 더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교실에 갓난아이와 부모를 초대해서 학생들이 갓난아이를 만나고 돌보는 경험을 나눔으로써 공감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인 ‘공감의 뿌리’를 운영하는 교육자 메리 고든은 공감의 커리큘럼을 학교에서 배움으로써 사회 적응력과 감성 능력을 길러주며 공적으로 쓸모 있고 사적으로 충만한 사람을 길러낸다는 목표를 제시한다. 이런 다양한 시도와 새로운 교육 과목들이 공교육이 길러내는 인간상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스테디셀러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의 저자 로버트 풀검은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이유는 문명인을 만들기 위해, 즉 인간 사회의 기본 제도를 가르치기 위해서라면서 유치원에서 배운 지혜를 다음과 같이 풀어놓는다. “무엇이든 나누어 가지라. 공정하게 행동하라. 남을 때리지 말라. 사용한 물건은 제자리에 놓아라. 자신이 어지럽힌 것은 자신이 치우라. 내 것이 아니면 가져가지 말라, 다른 사람을 아프게 했다면 미안하다고 말하라.”

이 글의 교훈은 유치원 아이들에게 이런 걸 잘 가르치라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조차도 잊고 있는 아주 기본적인 사회의 규칙을 일깨우려는 것이다. 가진 것을 나누고, 약자를 배려하고, 자기가 한 일에 책임을 지라고 배운 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각박한 사회를 만들어버린 어른들이 먼저 나서서 유치원에서 배웠어야 할 내용을 복습하고 공감과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할 때다. ‘평생 공부하는 역량’도 21세기 역량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니, 변화한 세상을 다시 배우면서 미래의 교육을 상상하는 대화를 시작해보자.

이수인 에누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