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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한슬이 고발한다

빚투구제가 청년정책인가요...尹을 환상 빠뜨린 '짐작의 정치'

중앙일보

입력

박한슬 약사 출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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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4일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발언하는 윤석열 대통령. 배경은 신용회복위원회. 그래픽=김경진 기자

지난 7월 14일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발언하는 윤석열 대통령. 배경은 신용회복위원회. 그래픽=김경진 기자

대통령을 바라보는 국민의 눈초리가 매섭습니다. 대선 당시(지상파 3사 출구 조사 기준) 윤석열 대통령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냈던 60대 이상의 대통령 직무 지지율이 30%대로 내려앉았고, 2030 남성도 등을 돌렸습니다. 이런 지지율 하락세가 몇 달째 이어지는데 반등할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조바심 탓인지 대통령실과 정부는 되레 이상한 청년 정책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빚투’ 구제정책입니다. 사실 이걸 왜 굳이 청년 정책이라고 포장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 주변 청년은 비판 일색이라서요.

비판과 역풍 부른 채무 탕감

지난해 11월 22일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에서 청년 채무부담 경감을 위한 업무협약식이 열렸다. 청년 채무 탕감 정책은 전 정부에서도 추진됐다. 왼쪽 둘째가 유은혜 당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뉴시스]

지난해 11월 22일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에서 청년 채무부담 경감을 위한 업무협약식이 열렸다. 청년 채무 탕감 정책은 전 정부에서도 추진됐다. 왼쪽 둘째가 유은혜 당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뉴시스]

‘영끌족 구제’나 ‘빚투 구제’와 같은 자극적 표현이 언론에 등장하다 보니 마치 새 정책이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재탕 수준이라는 걸 윤 대통령 본인이 누구보다 더 잘 알 거라 생각합니다. 경제 위기 상황은 물론이고 평시에도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채무를 탕감해주는 정책은 이미 오래전부터 꾸준히 시행 중입니다. 법원의 회생제도, 대출해준 은행이 맡아 시행하는 프리워크아웃, 신용회복위원회의 채무조정 프로그램 등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존 정책 이름 앞에 굳이 ‘청년’이란 딱지를 붙여 마치 새 정책인 양 홍보하려던 시도는 되레 ‘불공정’과 ‘도덕적 해이’이라는 비판과 역풍만 불렀습니다. 빚내서 위험한 투자를 한 사람은 정부 지원을 받고, 이런 데 눈 돌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거나 혹은 빚내서 투자했더라도 착실히 빚을 갚아온 사람은 손해를 보는 게 아니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으니까요. 가뜩이나 평소 투자 성공담을 들먹이며 젠체하던 투자자들에 대한 반감이 있던 터라 더 용납하기 어려웠을 테고요.

모든 국민이 반기는 정책이란 불가능에 가깝다 보니 새 정책을 내놓을 때마다 이런저런 논란이 벌어집니다. 어찌 보면 민주국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겠네요. 하지만 이번은 그런 긍정적 논란과는 거리가 멉니다. 정작 더 중요한 자영업자·소상공인 채무조정이나 주거 금융부담 경감 같은 정책은 빚투 논란에 묻혀 제대로 알리지도 못했다는 걸 고려하면 더욱 아쉽습니다. 대통령이 직접 비상경제민생회의라는 거창한 타이틀의 회의를 진행했는데, '빚내서 투자하다 망한 청년을 구제하는 이상한 정책만 논의하고 말았다'는 잘못된 인상만 국민에게 잔뜩 남겼으니까요. 재탕도 문제지만 그 재탕을 엉뚱한 방향으로 내놓아 불필요한 논란이 지속하자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나서서 “채무조정은 빚투나 영끌을 위한 제도가 아니다”라는 이례적 해명을 내놨습니다. 덕분에 청년 빚투 구제 논란은 어느 정도 마무리됐습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다른 정책에서도 이와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으니까요.

현실 괴리 정책이 지지율 낮춰 

'빚투 구제’ 논란 보름쯤 후 이번엔 교육부가 갑작스럽게 만 5세 입학이라는 학제 개편 정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출발 선상의 교육격차를 해소하고, 국가가 보다 어린 연령부터 책임져 젊은 부부의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명분에서 나온 정책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선 정책 수혜자인 학부모의 대대적인 반대에 부딪혀 교육부 장관이 취임 한 달 만에 사퇴하는 최악의 결말을 맞았습니다. 막연히 누군가에게 좋을 거라 생각해 일단 밀어붙였다가 반대 여론에 부딪히면 철회하거나 무마하는 패턴이 똑같이 반복된 셈입니다.

저는 바로 이 지점이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청년층을 비롯해 지지층 이탈의 이유가 여기 있다는 말입니다.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제도를 시행하기에 앞서 최소한 당사자가 겪는 실제 현실을 파악하고 의사를 묻는 과정이 사라진 게 정책에 대한 강한 반감에 더해 지지율 저하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언젠가 고마워할 것" 믿음은 환상 

윤 대통령은 출근길 도어 스태핑(약식 기자회견) 등 여러 자리에서 낮은 지지율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좀 엉뚱하게 “국민만 바라보고 정치하겠다”는 답변을 자주 하더군요. 전에는 딱히 할 말이 없어 나오는 그저 의례적인 표현이라 여겼는데 최근의 정책 행보를 겪고는 대통령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정책인데 국민이 몰라서 그런 것이니 내 뜻대로 하다 보면 언젠간 국민도 고마워할 거란 믿음이 깔린 게 아닌가 싶어서요. 그런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사교육없는세상 등 45개 시민단체가 모인 '만5세 초등취학 저지를 위한 범국민연대'가 지난 8월 5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 집무실 맞은편에서 시위를 벌였다. [뉴시스]

사교육없는세상 등 45개 시민단체가 모인 '만5세 초등취학 저지를 위한 범국민연대'가 지난 8월 5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 집무실 맞은편에서 시위를 벌였다. [뉴시스]

최근 서울의 집중 호우 당시 '비 오는 날에는 배달 기사 안전을 위해 배달 음식은 가급적 시켜 먹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SNS상에서 화제가 됐습니다. 선한 의도가 잘못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지인인 배달 기사는 이런 반응이 뭘 모르는 소리라고 하더군요. 운행이 힘들 정도의 폭우라면 아예 배달을 안 하고, 적당한 수준의 눈비가 내릴 때는 건당 1000원씩 할증이 더 붙어서 차라리 비 내리는 날을 더 선호한다고 합니다. '비 오면 배달 음식 먹지 말자'는 주장이 얼마나 현실 모르는 주장인가요. 배달과 정책을 동일 선상에 놓을 수는 없지만 ‘도움이 되는 정책’이라는 것도 어쩌면 SNS상에서 선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처럼 현장은 모르고 내 머릿속 의도만 좋다고 내놓는 건 아닐까요.

마음 얻고 싶으면 우선 경청해야 

지금 윤 대통령이 그 자리에 있는 계기는 ‘조국 사태’였죠. 정권이 권력 수사를 한다는 이유로 검찰총장을 흔들었고,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뚝심 있게 저항하며 꿋꿋하게 수사하던 태도가 정치인 윤석열의 자산이 됐습니다. 옳고 그름이 명확히 나뉘는 범죄 수사에서는 주위 여론과 무관하게 정의 구현에만 집중하는 게 정답일 수 있겠죠. 하지만 정치는 달라야 합니다. 정치는 단 하나의 정답 찾기가 아닙니다. 특히 여느 평범한 정치인이 아니라 대통령이라면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듣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청년 정책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청년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이니, 혜택을 입으면 자연스레 감사할 것이라는 식으로 무작정 시작하면 좋지 못한 결과로 이어지는 게 당연합니다. 청년의 마음을 사고 싶으면 짐작의 정치가 아닌 경청의 정치를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