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 높여도 또 잠긴 마을…하늘엔 '폭포비 시한폭탄'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2022.08.23 02:00

업데이트 2022.08.23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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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강원 강릉시 장덕2리 주민 김윤자 씨가 폭우로 인해 피해를 입은 집 안에 앉아 있다. 천권필 기자

강원 강릉시 장덕2리 주민 김윤자 씨가 폭우로 인해 피해를 입은 집 안에 앉아 있다. 천권필 기자

이장님! 저 좀 살려주세요.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장덕2리 이장인 조웅구 씨는 지난 17일 자정,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다급한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급히 밖으로 나갔더니 비가 폭포수처럼 퍼붓고 있었고 갑자기 불어난 물에 마을은 잠겼다. 곧장 마을회관으로 달려간 그는 주민들을 깨우기 위해 전화를 돌렸다.

폭우가 내린 지 30분도 안 돼서 마을이 물에 잠겼어요. 빨리 대피하라고 침수가 될만한 집들에 전화를 돌렸는데, 문이 안 열리는데 어떻게 나가느냐고…. 

- 조웅구 이장

강원도소방본부 119구조대원들이 강원 강릉시 주문진읍 장덕2리에서 거동이 불편한 주민을 구조해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 강원도소방본부

강원도소방본부 119구조대원들이 강원 강릉시 주문진읍 장덕2리에서 거동이 불편한 주민을 구조해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 강원도소방본부

그날 자정 전후로 내린 강수량은 시간당 70㎜ 이상으로 추정된다. 물폭탄이 마을을 덮쳐 10여 가구가 잠겼고 주민 25명이 대피했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주민들은 119구조대의 도움을 받아 무사할 수 있었다.

사흘이 지난 20일, 쑥대밭이 된 마을은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 더딘 피해 복구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주민들은 물이 들이닥친 장판을 뜯어내고 시멘트 방바닥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20년 전 루사 악몽 재현…“담 높여도 소용없어”

17일 오전 강원 강릉시 주문진읍 장덕리에 기습 폭우가 쏟아지면서 도로가 끊기고 주택이 침수된 피해가 발생하자 굴착기 등 장비와 인력이 투입돼 복구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17일 오전 강원 강릉시 주문진읍 장덕리에 기습 폭우가 쏟아지면서 도로가 끊기고 주택이 침수된 피해가 발생하자 굴착기 등 장비와 인력이 투입돼 복구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주민들은 20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난 것 같다고 했다. 2002년 8월 마을을 초토화했던 태풍 ‘루사’ 얘기였다. 당시 강릉에는 870.5㎜의 기록적인 폭우가 내려 46명이 숨지고 5명이 실종됐다. 재산 피해도 8000억 원에 달했다.

큰 수해를 입은 뒤 장덕2리 주민들은 집을 땅에서 1m가량 높게 짓고 담도 더 높게 쌓았다. 그러나, 20년 만에 다시 찾아온 기후 재난을 피하지 못했다.

루사 때랑 똑같아요. 자는데 물이 올라와서 나갈 수도 없고, 기어서 뒷집으로 겨우 도망갔어요. 그때는 젊기라도 했지만, 또 같은 일을 겪으니 막막하죠. 

- 김윤자(81) 씨

이장 조씨는 “비가 양동이로 붓는 것처럼 오니까 어떻게 하지를 못하겠더라. (루사 이후) 담벼락도 높였지만, 다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다.

100㎜ 넘는 폭포비, 14번이나 관측

지난 8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의 한 횡단보도에서 우산을 쓴 시민들이 길을 건너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8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의 한 횡단보도에서 우산을 쓴 시민들이 길을 건너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장덕2리처럼 ‘역대급’ 폭포비가 쏟아진 곳은 큰 피해를 입었다. 시간당 100㎜가 넘은 비가 내린 서울 강남 일대도 물바다로 변했다. 서울 신림동에서는 반지하 주택에 살던 일가족 3명이 대피하지 못해 숨지는 등 인명피해도 컸다. 전북 군산과 충북 충주, 강원 양양 등 전국 곳곳에서 기습 폭우로 인해 침수 등의 비 피해를 봤다.

장마철이 지난 8월에 폭우 피해가 컸던 건 역대 어느 해보다도 강한 비가 특정 지역을 집중적으로 때렸기 때문이다. 기상청은 보통 한 시간에 30㎜ 이상 비가 내리면 집중호우라고 분류한다. 이런 비가 3시간 이상 내릴 것으로 보이면 가장 높은 특보 기준인 호우경보를 발령한다.

기상청과 지자체 기상 관측망을 분석한 결과, 이달에만 시간당 100㎜가 넘는 비가 전국적으로 14번이나 관측됐다.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에서는 비공식 측정치이긴 하지만 115년 관측 이래 가장 많은 시간당 141.5㎜의 비가 내렸다. 기상청에서 오래 근무한 예보관들조차 “상상을 뛰어넘는 수치”라고 할 정도였다. 물폭탄 또는 폭포비라는 비유가 적절해 보이는 폭우는 대비할 틈도 없이 갑자기 좁은 지역에 퍼부었다.

수증기 시한폭탄 언제든 터질 수 있어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이례적인 폭우의 원인과 관련해 기상 전문가들은 공기가 머금고 있는 물의 양, 즉 수증기에 주목했다. 공기 중의 수증기량은 비가 얼마나 많이 내릴지는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최근 한반도와 주변 바다의 수증기량은 적도의 열대지방 수준으로 이례적으로 높다. 기상청은 대기 중의 총 수증기량을 말하는 가강수량(TPW·Total Precipitable Water)이 40㎜를 넘으면 많은 비가 내릴 수 있다고 보는데, 이달 들어 한반도 주변의 가강수량은 최대 70㎜를 넘었다. 매우 많은 수증기는 마치 석유 연료처럼 비구름에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언제, 어디서든지 폭포비를 쏟아낼 수 있는 ‘시한폭탄’ 같은 수증기가 하늘 위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기후변화가 아니면 올여름 이례적인 집중 호우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기온이 1도 오를 때마다 대기가 포함할 수 있는 수증기량은 7%가량 증가한다. 온난화의 영향으로 기온이 오르면서 대기 중 수증기의 양이 많아졌고, 이로 인해 물폭탄 수준의 집중 호우가 잦아졌다는 설명이다.

우진규 기상청 예보분석관은 “기온이 높다는 건 쉽게 말해 밥그릇의 크기가 커졌다는 것으로 공기 온도가 높을수록 안에 들어가는 수증기량은 더 많아진다”며 “여기에 이달 들어 서해의 수온이 28~29도로 태풍이 발생할 수 있는 수준(26~27도)을 뛰어넘고 있어서 열대지방의 수증기가 바다를 통해 한반도에 계속해서 공급되고 있다”고 말했다.

“기후재난 잦아질 것…배수시설 등 대비해야”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실제로 30㎜ 이상의 집중 호우 일수는 최근 100년 새 뚜렷한 증가세 보인다. 기후 전문가들은 앞으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지 않을 경우 기후 변동성이 더 커지면서 극단적인 기후재난 현상의 강도가 강해지고, 빈도도 더 자주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21세기 말에는 한반도에서 여름철 집중 호우 일수가 지금보다 최대 15일가량 늘어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허창회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는 “앞으로 온도가 올라가면 이런 집중 호우는 여름철은 물론 봄과 가을에도 계속해서 반복될 수밖에 없다”며 “서울 강남 일대의 배수시설부터 새롭게 다시 하는 등 기후변화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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