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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79% 폭등에도 금리 인하, ‘에르도안 도박’ 또 성공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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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강남규 기자 중앙일보 국제경제 선임기자
강남규 국제경제 선임기자

강남규 국제경제 선임기자

지난달 물가가 79% 뛰었는데도 기준금리를 전격적으로 내린 나라가 있다. 바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끄는 튀르키예(터키)다. 이곳 중앙은행(CBRT)이 이달 18일 기준금리를 14%에서 13%로 1%포인트 인하했다. 서방 전문가들이 부르는 ‘에르도안의 도박’이 다시 시작된 셈이다.

튀르키예 기준금리 14→13% 인하
서방시장 긴축과 정반대 행보

사우디·러시아 손잡고 외교 줄타기
미·유럽 돈 빠져도 오일달러 밀물
당장 외환위기 피해도 장기적 불안

CBRT는 성명에서 “산업활동의 모멘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기부양에 부합하는 금융 여건이 필수적”이라고 했다. 인하뿐 아니라 이유도 서방 시장의 통념과 정반대다. 물가 급등 시기엔 기준금리를 올려 산업활동을 위축시키는 게 일반적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서방 매체는 ‘에르도안의 반(反)시장적인 행위’라는 식으로 묘사했다.

터무니없는 지적은 아니다. 튀르키예가 짊어지고 있는 외화표시 채무가 국내총생산(GDP)의 절반 가까이 된다. 국채는 이미 투기 등급이다. 외채 시장에서 상당한 웃돈(가산금리)을 줘야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그래프 참조〉 사정이 이쯤 되면, 기준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게 상식이다.

에르도안, 트럼프와 충돌 ‘환란 후보 1위’

튀르키예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오른쪽)이 지난 6월 사우디아라비아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왼쪽)를 자국으로 초대했다. 두 나라는 2018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사건 이후 싸늘했지만, 오일달러와 이란 견제를 위해 서로가 필요했다는 분석이다. [AP=연합뉴스]

튀르키예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오른쪽)이 지난 6월 사우디아라비아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왼쪽)를 자국으로 초대했다. 두 나라는 2018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사건 이후 싸늘했지만, 오일달러와 이란 견제를 위해 서로가 필요했다는 분석이다. [AP=연합뉴스]

에르도안의 도박에 시장이 적응해서일까. CBRT가 기준금리를 내린 직후 리라화 가치나 이스탄불 증시는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리라화 가치는 18일 1.1% 정도 하락했다. 뜻밖의 반응이다. 터키는 오래전부터 환란 후보였다. 미 신용평가회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2018년 10월 튀르키예를 미국의 통화긴축에 ‘취약한 새로운 다섯 나라(New Fragile Five)’ 가운데 첫 번째로 꼽았다. 외채 규모뿐 아니라 에르도안 대통령과 당시 미국 트럼프 대통령 사이 갈등이 근거였다.

그때 월가 사람들 눈에 튀르키예는 제2의 서브프라임(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를 일으킬 방아쇠로 비쳤다. 서브프라임 사태가 각종 파생상품 메커니즘 때문에 금융위기로 번졌듯이, 튀르키예 기업이 발행한 달러화나 유로화 표시 회사채는 대출채권담보부증권(CLO)으로 재포장(구조화)돼 서방 금융회사 포트폴리오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미국 등이 돈줄을 죄면 튀르키예 기업이 채무를 이행하지 못해 결국 CLO 사태가 발생한다는 게 당시 전망이었다.

여기에다 트럼프-에르도안 사이에 벼랑 끝 승부까지 더해졌다. 튀르키예에 억류 중인 미국 목사 석방 여부를 놓고서다. 트럼프는 보복관세로, 에르도안은 수입금지로 치고받았다. 그 바람에 약 1200억 달러에 이르던 외환보유액이 2018~19년 사이에 400억 달러 수준으로 빠르게 줄었다. 이런 와중에 에르도안은 중앙은행 총재를 경질하고 말을 잘 듣는 인물을 내세웠다. 기준금리를 2019년에만 4차례 내렸다. 달러가 빠져나가는 와중에 금리인하였다. 에르도안의 첫 번째 도박이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행운의 여신은 에르도안 편이었다. 2020년 3월 팬데믹이 본격화했다. 미국과 유럽 등이 경쟁적으로 돈을 풀었다. 넘쳐나는 달러와 유로가 튀르키예로 흘러들었다. ‘결과적으로’ 에르도안의 금리인하 처방이 맞아떨어졌다. 외환보유액이 400억 달러 선에서 720억 달러 수준으로 불어났다.

자신의 성공에 취해서일까. 에르도안이 다시 기준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서방 전문가들은 그가 ‘금리가 높을수록 물가가 더 오른다’는 사이비 논리를 믿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그런데 이런 비판만으론 그의 도박 이유가 드러나진 않는다. 그는 이슬람 금융 신봉자다. 이자를 죄악시한다. 그가 종교적인 이유로만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따르는 게 아니다. 실익이 있다. 영국 경제분석회사인 옥스퍼드이코노믹스의 신흥시장 투자 전략가인 레지스 샤틀리에는 최근 보고서에서 “튀르키예가 걸프지역에서 상당한 자금지원을 받고 있다”며 “서방 자금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이슬람 자금이 메워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랍에미레이트(UAE)와 카타르 자금이다. 최근엔 사우디아라비아 오일머니도 가세했다.

‘정직한 거간꾼’ 자처, 돈·에너지 얻어내

기준금리 인하 직후 외화를 사려는 사람들이 모여든 튀르키예의 환전소. [EPA=연합뉴스]

기준금리 인하 직후 외화를 사려는 사람들이 모여든 튀르키예의 환전소. [EPA=연합뉴스]

여기엔 에르도안의 외교수완이 한몫하고 있다. 그는 올봄 사우디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를 만났다. 2018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튀르키예 영토 안에서 살해된 지 3년 6개월 만이다. 두 사람 모두 상대 손을 빌려 가려운 등을 긁어야 하는 처지다. 에르도안은 오일달러가 절실했다. 빈살만은 이란을 견제하는 데 튀르키예가 필요했다. 요즘 에르도안은 ‘정직한 거간꾼(honest broker)’을 자처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사이에서 분주하다. 그 결과 러시아에서 에너지와 루블화 자금을 얻어내고 있다.

이런 외교 저글링을 하는 와중에 에르도안이 기준금리를 내렸다. 에르도안의 두 번째 도박이다. 서방 자금이 떠난 자리를 오일머니 등이 채울 것이라고 믿어서다. 시장 논리 대신 외교 수완에 기대고 있는 셈이다. 샤틀리에는 보고서에서 “튀르키예가 단기적으로는 외환위기를 피할 수 있다”며 “하지만 장기적으론 불안하다”고 전망했다. 외교 수완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 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