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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태규가 고발한다

'판사는 미뤄서 조진다' 조롱…우영우같은 빠른 재판 없는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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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태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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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 대법원장. 배경은 전국법관회의. 그래픽=김경진 기자

김명수 대법원장. 배경은 전국법관회의. 그래픽=김경진 기자

보통 사람이 어떤 분쟁에 맞닥뜨렸을 때 이성을 지키며 차분히 해결책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 특히 돈과 관련해 당장 생활비가 없거나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 불안해서 오히려 이성이 마비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불안한 날을 보내는 고통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우는 것밖에 없을 때도 있다. 때로 주변에 하소연해보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이쯤 되면 어떻게든 빨리 분쟁을 해결해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간절한 소망이 된다. 변호사 업무를 하다 보면 소송 의뢰인의 이런 답답한 심정이 그대로 느껴진다.

마음 급한 의뢰인은 소장을 내면 조속히 결과가 나올 거라 기대하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하세월 기다림뿐이다. 변호사에게 연락하면 "재판기일이 아직 안 잡혔으니 기다려보자"고만 한다. 그런 시간이 급기야 6개월을 넘기면 그다음부터는 부아가 치밀기 시작한다. ‘내 사건을 처박아 두고 아예 관심을 가지지 않는구나’ 싶어 변호사에게 항의도 해보고 법원을 원망해보기도 하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라는 법언이 주는 의미를 실감하게 된다.

법원은 판사들에게 대략 2년 이상 지난 장기미제사건에 대해 보고서(카드 형식)를 쓰도록 하고 있다. 사건을 묵히는 일을 없애려는 최소한의 장치다. 이런 장기미제사건이 최근 5년간 민사소송은 3배, 형사소송은 2배로 늘었다. 첫 재판기일이 지정되는 기간도 많이 불어났다. 민사합의부 사건의 경우 2016년엔 120일(4개월) 정도였는데 현재는 150일(5개월) 정도 소요된다. 심할 땐 거의 1년이 다 되어서 첫 재판기일이 잡히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재판소요 시간도 민사합의부 1심 재판은 평균 322일에서 386일로, 2심은 239일에서 323일로 늘어났다. ‘검사는 불러서 조지고, 판사는 미뤄서 조진다’는 조롱 섞인 말을 절감하게 하는 긴 시간이다.

고법 부장 승진제 폐지 후폭풍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원래 우리나라 재판시스템은 효율성이 장점이었다. 대개 30대 안팎에 판사를 하는데, 당사자로선 벼락출세하는 셈이다. 대신 대가를 치러야 한다. 판사라는 신분이 주는 자존감이 심리적 추진력을 만들어 주는데, 매일 이어지는 야근도 그러려니 하면서 판결문 쓰는 기계처럼 일한다. 과로로 생명을 잃는 경우도 있지만 이를 보고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그렇게 일해 사건을 많이 처리하면 일 잘한다는 평판이 쌓이고 ‘판사들의 별’이라 불리는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되기도 한다. 관용차와 기사 등 차관급 예우가 주어지는 이 자리를 얻기 위해 판사들이 들이는 노력은 치열하다. 인해전술 쓰듯 밀려드는 사건 속에서 버틸 수 있는 건 이런 에너지를 뽑아낼 동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관차처럼 달리던 법원의 사건처리 속도가 뚝 떨어졌다. 원인은 다양하다. 여전히 다른 나라에 비해 판사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고, 국민 일반의 권리의식이 커지면서 절차와 관련한 문제 제기가 많아진 탓에 소송의 신속성을 저해한다는 평가도 있다. 다 맞는 말이지만 재판 속도가 떨어진 데는 법원 내부의 변화도 무시하기 어렵다. 판사들이 열심히 일할 동기와 압박이 사라졌다는 얘기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제도가 사라졌다. 과거 법원에서 이 자리를 얻기 위한 경쟁은 그야말로 별을 따듯이 치열했다. 후보군에 드는 판사들은 사건처리 통계나 상소율 그리고 법원 내 평판 등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노력했다. 사건을 열심히 처리하면서 일찍부터 자신의 평판도 관리하는 지난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제도가 없어졌으니 이제 크게 노력할 필요가 없다. 법관 서열화 타파가 명분이었지만 여기엔 경쟁을 피하고 싶은 판사들 심리가 반영됐다. 사건처리 통계도 사라졌다. 예전에는 매달 재판부마다 사건처리 결과를 통계로 작성해 열람했다. 마치 성적표를 받는 느낌이었다. 성적에 민감하게 자라온 사람들이라 서로 암묵적인 경쟁을 했다. 이렇게 판사들을 압박하던 통계가 재판권 침해라는 명분으로 사라졌다.

인기 좇는 판사 양산 

법원장 후보 추천제도 역시 큰 영향을 미쳤다. 각급 법원에서 투표로 법원장 후보를 3명 이내로 선정해 대법원에 올리면 그중에서 법원장을 임명하는 제도다. 법원장 임명에 판사들 의중을 반영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과거의 인사 관행으로는 후보에도 오르지 못할 사람이 법원장이 될 가능성이 생겼다. 외관상으로는 후보가 3인으로 제한되니 대법원장의 인사권이 축소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법원장의 선택 폭을 넓혀주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올해 인사에서 장낙원 서울행정법원 법원장처럼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 법관들이 기수나 경륜을 뛰어넘어 법원장에 임명된 건 이 제도 영향이 크다. 이 자체로도 문제지만 법원장 후보 추천제는 재판 지연의 원인이기도 하다. 법원장이 되기 위해 열심히 판결하고 후배를 독려하는 대신 법원장 후보 명단에 결정적 역할을 할 후배의 한 표를 얻으려고 질책 따위는 애초에 꿈도 꾸지 않으니 말이다.

2019년 2월 손봉기 대구지법원장이 취임식에서 직원들과 인사하고 있다. 손 원장은 전국 최초로 판사들이 추천하는 ‘법원장 후보 추천제’를 통해 법원장이 됐다. 뉴스1

2019년 2월 손봉기 대구지법원장이 취임식에서 직원들과 인사하고 있다. 손 원장은 전국 최초로 판사들이 추천하는 ‘법원장 후보 추천제’를 통해 법원장이 됐다. 뉴스1

이런 몇몇 제도 변화만 보더라도 굳이 판사들이 열심히 일할 동기가 거의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승진이 없어지고 인기로 법원장이 되면 굳이 좋은 평정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배석판사들이 일주일에 판결문 두 개만 쓰겠다고 버티면 재판장은 강제할 방법이 없다. 사건처리 건수는 당연히 줄어들고 소송이 지연된다. 이렇게 사건이 쌓이다 보면 그 어느 순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일이란 일머리를 잡고 처리하면 큰 어려움 없이 처리할 수 있다. 판사 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반대로 일머리를 놓쳐 과부하에 끌려가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늘어나는 사건을 감당하지 못해 허우적댄다. 제때 판결문을 작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변론을 마치고 선고기일을 잡았는데 판결문을 못 쓰면 선고일을 불과 며칠 남기지 않고 연기하거나 조정기일을 잡아 소송 당사자들에게 조정을 강권한다. 때로는 아무 설명 없이 선고기일만 3~4회 연기하는 걸 보기도 했다. 원만한 해결을 위해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하거나 검토할 쟁점이 많아 그랬다지만 웬만한 변호사는 판사의 속사정을 바로 안다. 이렇게 판결이 밀리면 새 사건을 돌볼 겨를이 없다. 결국 첫 재판기일은 마냥 멀어진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는 소송 착수부터 선고까지 일사천리로 재판이 진행된다. 현실은 이 드마라와 크게 다르다. 사진 방송 화면 캡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는 소송 착수부터 선고까지 일사천리로 재판이 진행된다. 현실은 이 드마라와 크게 다르다. 사진 방송 화면 캡처

현직 법관조차 ‘요즘 판사들 일을 안 한다’고 우려한다. ‘상벌이 모호해지면서 일보다 코드 맞추고 인기 얻는 데 더 관심이 많다’라는 지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나라 법관의 업무 강도가 상당하고, 또 법관 증원이 필요하다는 데에 여전히 동의한다. 그렇지만 증원만으로는 소송 지연이 해결되지 않는다. 아무리 작업자를 늘려도 작업 동기가 없는 작업자로 채워져 있으면 성과를 내기 어렵다. 최소한의 통계라도 공유하면서 사건처리를 독려할 필요가 있다. 이미 사라진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제도 부활이 어렵다면 법원장 추천제처럼 인기투표로 흐르는 제도는 재고해야 한다.

법관은 사법 관료로 임명되었고 국민은 그 전문 관료들이 일을 신속하고 성실하게 처리해주길 원한다. 그런 관료들이 워라밸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건 국민에 대한 소임을 다했다 보기 어렵다. 여전히 이 사회는 법관에게 존경을 표하고 지위를 보장하는데 이러한 혜택은 누리면서 국민에 대한 책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