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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9장에 담긴 속앓이…아무도 몰랐던 수원 세모녀 비극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2일 찾은 경기도 수원시 권선동 한 다세대주택. 전날(21일) 세 모녀로 추정되는 시신 3구가 발견됐다. 소방 등이 강제로 개폐 장치를 뜯어낸 흔적이 있다. 사진 채혜선 기자

22일 찾은 경기도 수원시 권선동 한 다세대주택. 전날(21일) 세 모녀로 추정되는 시신 3구가 발견됐다. 소방 등이 강제로 개폐 장치를 뜯어낸 흔적이 있다. 사진 채혜선 기자

“세상 살기 너무 힘듭니다.”

지난 21일 세 모녀가 숨진 채 발견된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한 다세대주택에는 60대 어머니와 40대 둘째 딸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이같은 내용의 글도 남겨져 있었던 것으로 22일 파악됐다.

수원 세 모녀, 어떤 글 남겼나

9장에 걸쳐 듬성등성 적은 글에는 난소암 투병 중인 어머니의 사정과 경련이 잦은 희귀병을 앓던 40대 큰딸의 건강문제 등 이들의 고단했던 삶이 담겨있다고 한다. 인근 주민 등에 따르면 둘째 딸이 실질적 가장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사업부도 후 빚을 남기고 사망해 세 모녀는 이 집에서 2년 넘게 전입신고조차 하지 않은 채 살아왔다.

세 모녀가 살던 곳은 12평 남짓한 방 2칸짜리 집이었다.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42만원. 이웃 주민인 80대 여성은 “이 동네에서 20년 넘게 살았지만 1○○호에 사는 사람들은 본 적 없다”고 말했다. 출입 자체가 드문 편이었다는 게 주변의 이야기다. 다만 집주인은 이달 초 이들로부터 “중환자실을 오가는 등 병원비 문제로 월세 납부가 조금 늦어질 수 있다. 죄송하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세 모녀 모두가 건강이 좋지 않았고 경제적으로 매우 절박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경찰은 한때 생활능력이 있던 아들이 먼저 희귀병으로 사망한 뒤로 생활고가 심각해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번에도 복지 사각지대

22일 찾은 경기도 수원시 권선동 한 다세대주택. 전날(21일) 세 모녀로 추정되는 시신 3구가 발견됐다. 초인종 위에는 가스검침원의 연락달라는 메모가 붙어 있다. 사진 채혜선 기자

22일 찾은 경기도 수원시 권선동 한 다세대주택. 전날(21일) 세 모녀로 추정되는 시신 3구가 발견됐다. 초인종 위에는 가스검침원의 연락달라는 메모가 붙어 있다. 사진 채혜선 기자

이번 사건을 놓고 “죄송하다”는 메모와 마지막 집세 등을 남기고 숨진 2014년 서울 송파구 세 모녀 사망 사건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정부는 송파구 세 모녀 사망 사건 이후 사회보장정보시스템을 개선하고 공과금을 3개월 이상 체납하면 관련 정보가 관할 구청에 통보되도록 했다.

그러나 수원 세 모녀의 공과금 체납 사실은 파악됐지만 관할 지자체는 이들을 찾을 수 없었다. 이들은 2020년 2월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지인 집에 주소를 옮겨둔 채 수원시의 마지막 집으로 이사하면서 전입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원시 관계자는 “전입신고만 됐어도 상황에 따라 긴급생계지원비 120만원 등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세 모녀가 주소를 올려둔 화성시는 이들의 건강보험료 체납 사실을 통보받고 지난 3일 주소지를 찾아갔지만 그곳에 살지 않는 이들을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들의 건보료는 16개월이나 밀려있었다. 화성시 관계자는 “이사간 주소나 연락처를 전혀 남기지 않아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화성시 관계자는 “빚독촉을 피해 전입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지역 통장 등이 이런 사정이 있는 분들을 찾아내곤 하는데 세 모녀에 대해선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지자체에 기초생활수급 등 복지서비스를 상담하거나 신청한 적도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지난 21일 “문이 잠긴 세입자 집에서 악취가 난다”는 건물주의 112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해 세 모녀의 시신을 발견했다. 외부 침입 흔적이나 외상 등은 없던 점 등을 근거로 경찰은 이들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경찰은 냉장고 내 음식물 유통기한이나 휴대전화 사용 내역 등 생활 반응을 토대로 이들의 사망 시점을 조사하는 한편 이들의 시신을 인수할 방계 가족들을 수소문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시신이 최소 열흘은 방치된 것으로 보이는데 최근 날이 무더워 부패 정도가 심했다”며 “부검을 통해 정확한 사인 등을 밝힐 계획”이라고 말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으면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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