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핑크 리사는 이 시대 탑 댄서인 것 같아요. 다음 연구 주제로 삼고 싶을 정도로…."
발레와 현대무용을 전공한 무용과 교수가 "K팝 댄스는 이제 현대무용의 한 장르"라고 선언했다. 미국 샌디에이고 주립대학교에서 무용 이론을 가르치고 있는 오주연(38) 교수다. 지난달 미국에서 펴낸 『K-pop Dance: Fandoming Yourself on Social Media(K팝 댄스: 소셜 미디어에서 자신을 팬덤화하는 법)』(이하 『K-pop Dance』)를 들고 한국을 찾은 그는 19일 인터뷰에서 “춤 동작은 배우면 누구나 출 수 있지만 큰 무대를 홀로 가득 채우는 응축된 카리스마와 매력, 스타성을 타고나는 공연자는 몇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 아이돌 중 지민(BTS), 태민(샤이니) 등 뛰어난 댄서들이 너무 많다"며 "그들에 대한 연구를 언젠가 하고 싶다"고 말했다.
『K-pop Dance』는 최근 K팝 댄스의 특징, SNS와의 연계성, 사회 계층에 따른 K팝 댄스 팬덤 특성 등 해외에서 'K팝 댄스'를 즐기는 팬층의 다양한 면을 담은 책이다. 미국 아마존 대중춤·커뮤니케이션 분야 신간 중에서 지난달 1위에 올랐다. 오 교수는 "미국의 초‧중학생들은 당연하게 K팝 댄스를 아는데, 이걸 소개하고 분석하는 학문적인 텍스트가 하나도 없었다”며 “최근 K팝 댄스가 번지는 사회적 현상을 기록하고 안무를 무용 이론적 관점에서 분석한 거의 유일한 책"이라고 설명했다.
10초·사각형 SNS 잡아라… 상체 집중 K-안무
오 교수에 따르면 현재의 K팝은 소셜미디어에 특화된 ‘상체 중심 댄스’로 진화했다. 오 교수는 “K팝은 트렌드에 가장 민감한 춤 장르라서, 10초 남짓의 틱톡 영상 이용자를 사로잡기 위해 댄서 얼굴 주변의 팔 동작이 많고, 표정 변화도 크다”며 “2차원 사각형 안에서 선을 강조하기 위해 상체가 마를수록 강점이고, 부피감을 보완하기 위해 강한 파핑(Popping, 전신 근육에 힘을 줬다 이완시키는 동작의 스트릿댄스)을 하는 게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최근 걸그룹 춤을 배워보니 전신이 울려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라고 했다.
또 "사각형의 상체, 얼굴 위주의 댄스가 콘서트 무대 등에서 다소 작아 보일 수 있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화려한 백업 댄서의 역할이 늘어났다"고 했다. “한동안 K팝 그룹 멤버 수가 늘어나면서 백업 댄서가 거의 필요 없었는데, 최근 들어 큰 무대에서 많은 댄서를 활용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설명했다.
발레·현대무용 전공한 무용이론가가 본 K팝 댄스, "이젠 현대무용 장르"
K팝은 정통 무용계에서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분야였다. 그래서 연구서나 연구자가 거의 없었다. 오 교수는 "이제는 K팝 댄스가 완전히 춤의 한 장르가 됐다”고 했다. 오디션 프로그램 등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댄스 학원에서 공통적으로 가르치는 ‘K팝 매뉴얼’이 생긴 게 그 반증이다. "탱고를 잘 춘다고 살풀이를 잘 추는 건 아니듯, 춤을 엄청 잘 춰도 'K팝 스타일'이 아니면 오디션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생길 정도로 장르가 확고해졌다"고 설명했다.
오 교수는 "한국의 K팝 댄스는 한국전쟁 직후 미국 문화가 유입될 때 들어온 미국 춤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후 한국의 경쟁사회, 아이돌 문화 등이 더해지며 독창적으로 발전했다"고 분석했다. “기록을 잘해놓지 않으면 다른 나라에서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며 “K팝 댄스는 한국의 역사적 맥락과 강도 높은 훈련을 바탕으로 한국에서만 나올 수 있었던 장르”라고 강조했다.
'살기 위해 K팝 춘다'는 이민자들… "새로운 코리안 드림"
오 교수는 2015년 뉴욕에 자리 잡은 이민자 청소년들이 BTS 춤을 추는 현상에 흥미를 느껴 K팝 댄스 연구를 시작했다. "형편 어려운 청소년들이 '살기 위해 춤을 춘다'고 말하는 게 뜻밖이었고 사회적 맥락을 분석할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며 "상황이 좋지 않을수록 단순한 '현실도피'나 '즐거움'을 넘어 '진짜 K팝 아이돌이 되고 싶어서' 춤을 추더라. 이들에게는 'K팝 아이돌'이 '코리안 드림'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어린 시절 무용을 했고, 미국 사회의 이방인으로 오래 지낸 오 교수 자신의 이력이 K팝의 사회적 맥락은 물론 무용 특성을 모두 짚는 데 도움이 됐다. 미국에서 같은 시기 박사 과정을 시작한 연구 동료들 가운데 자신만 한국인인 데다 K팝이 '소수 장르'여서 강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바람에 밤 12시까지 연구실에서 글만 쓰며 버티던 시절도 있었다. 오 교수는 "결국 박사 과정도 가장 먼저 끝냈고, 논문 실적이 좋아 교수 자리를 얻는 데도 도움이 됐다"며 "K팝이나 무용계나 20대 후반에 은퇴하는 빼어난 인재들이 많은데, K팝 댄스는 거대한 블루오션이니 이를 연구하는 쪽으로도 많이 진출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