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위한 마지막 장애가 제거됐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 1992년 8월 한ㆍ중 수교에 즈음한 담화)
1992년 한·중 수교는 노태우 정부 북방 외교의 대표적 성과로 꼽힌다. 6·25전쟁 때 적(敵)으로 싸웠던 중국의 지지를 바탕으로 평화 통일을 추진한다는 포부가 바탕이 됐다. 수교 이후 양국은 6자 회담 등을 통해 북한 비핵화를 위해 함께 뛰었고, 30년만에 무역 규모를 47배로 키우는 등 경제 협력 성과도 이뤘다.
그간 양국은 마늘·김치파동 등을 거쳤고, 잊을만하면 불거지는 역사 및 문화 왜곡 등으로 양국 관계가 요동쳤다. 특히 현재 진행형인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에 따른 갈등은 가장 큰 도전요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앙일보는 지난 30년간 양국 관계 발전의 명암(明暗)이 됐던 8개의 변곡점을 짚어봤다.
① 정전 39년만의 한ㆍ중 수교 (1992년)
92년 한ㆍ중 수교는 양국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정이었다. 공동성명에는 '하나의 중국'과 '평화적 남북 통일'이 모두 포함됐다. 당시 외무부 관계자들은 "서로가 선물을 주고받았다"고 평했다. 중국은 북한의 반발을, 한국은 대만과의 단교를 감수하고 실리를 챙겼기 때문이다.
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장은 당시 이해 관계에 대해 "한국은 북한을 정상 국가로 이끌기 위해 중국이 필요했고, 중국은 개혁ㆍ개방 과정에서 한국같은 기술력을 가진 국가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수교 후 5년만인 97년 '주체사상의 창시자'로 알려진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주중 한국 총영사관을 거쳐 망명했는데, 이때도 황장엽이 북한의 거센 항의를 무릅쓰고 무사히 한국까지 오는 데도 중국의 공이 있었다는 평가다.
중국의 거대 시장은 97년 IMF 외환위기 사태 때 위기 극복을 돕는 완충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90년대 말부터 중국에 '사랑에 뭐길래' 등 한국 드라마 열풍이 불면서 시작된 한류 또한 양국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일조했다.
②사드 한한령(限韓令)의 전신 '마늘 파동'(2000년)
2000년 '마늘 파동'은 양국 간 사실상 첫 통상 마찰이었다. 발단은 김대중 정부가 국내 농가를 보호하기 위해 발동한 중국산 마늘 긴급수입제한(세이프가드) 조치였다.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에 따라 관세율을 30%→315%로 높였는데, 당시만 해도 WTO 가입국이 아니었던 중국은 한국산 휴대폰과 폴리에틸렌의 수입을 중단하며 보복에 나섰다. 한국은 한달여만에 냉동 마늘의 관세율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사실상 '한국의 항복'으로 일단락된 사건이었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 외교가에선 "한국은 몰아붙이면 굴복한다는 잘못된 교훈을 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③역사 왜곡의 시발점 '동북공정'(2002~2007년)
'잘못된 교훈'은 현실이 됐다. 중국은 마늘 파동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동북공정'으로 역사전쟁에 불을 붙였다.
중국은 국책 싱크탱크인 중국사회과학원과 동북 3성(지린·랴오닝·헤이룽장성)이 공동으로 진행한 연구를 바탕으로 "동북 3성 일대의 과거 민족사가 모두 중국에 속한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중국은 고조선·고구려·발해가 한국의 역사라는 사실을 부정했다. 중국은 2007년에 동북공정을 공식 종료했지만, 관련 학술 자료는 계속 발간하고 있다.
동북공정을 시작으로 중국은 전체 역사 왜곡을 본격화했다. 지난 2월 베이징 올림픽 개회식에는 한복을 등장시키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중국이 문화 제국론을 앞세우고 애국주의 교육을 강화하면서 자국을 문화 대국, 주변국을 소국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며 "실제로 한복, 김치 등 이웃 나라인 한국의 문화까지 전부 '원조는 중국'이라는 생각이 팽배하다"고 말했다.
④북핵 머리 맞댄 6자회담(2003~2008년)
마늘전쟁과 문화전쟁 와중에도 한ㆍ중은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큰 시도를 함께 했다.
양국은 2003~2008년 6자회담(남ㆍ북ㆍ미ㆍ중ㆍ러ㆍ일) 당사국으로서 북한 비핵화를 위해 함께 머리를 맞댔다. 특히 6자회담의 시초는 2003년 베이징에서 열린 미ㆍ중ㆍ북의 3자 회담이었다.
비록 6자 회담은 2008년 12월 12차 회의를 끝으로 중단됐지만, 북한의 핵 포기를 명시한 2005년 9ㆍ19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회담 관계자들은 "비록 완전한 성공을 이루진 못했지만, 중국이 당사국 중 유일한 북한의 우방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하면서 '대화를 통한 해결'의 가능성을 확인한 계기를 만들었다"고 입을 모은다.
⑤"한국산은 불량, 종주국 굴욕" 중국발 '김치 전쟁' (2005년)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10월 '마늘 파동'의 데자뷰 격인 '김치 전쟁'이 벌어졌다. 중국산 김치에서 기생충알이 나오자 당시 정부는 중국산 김치의 검역 비율을 100%로 높였다. 이에 중국은 "한국산 김치에서도 기생충알이 검출됐다"며 역공을 펼쳤다. '김치에는 김치로 대응한다'는 전략이었다. 그런데 당시 중국이 문제 삼았던 김치는 중국에서 생산된 '짝퉁 한국산'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김치 전쟁으로 중국 내 한국 식당과 김치 생산 업체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김치전쟁은 최근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다. 중국은 2020년 11월 파오차이(소금으로 절여 발효시킨 채소)에 대한 국제표준화기구(ISO) 인증을 받은 뒤 관영 매체인 환구시보를 통해 "김치 종주국인 한국이 굴욕을 당했다"고 보도했다. 과거 '무역갈등' 수준에 그쳤던 중국이 그간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뒤 억지 주장을 통한 문화·역사 전반으로의 확전을 꾀하려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⑥'전략적 협력 동반자' 격상 (2008년)
갈등의 와중에도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2008년엔 양국 관계가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됐다. 기존의 경제ㆍ문화 교류를 넘어 정치ㆍ외교안보ㆍ군사 등 민감한 분야까지 실질적 협력을 강화한다는 의미다.
이희옥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명박 정부가 한ㆍ미 동맹을 중시했지만, 동시에 중국의 후진타오(胡錦濤) 정부와 '전략적' 관계를 맺은 건 중국과도 양자 현안을 넘어 지역과 국제 문제를 함께 논의하고 협력하겠다는 의미였다"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양국 관계는 수교 이후 우호협력(92년) → 협력동반자(98년) → 전면적 협력동반자(2003년) → 전략적 협력동반자(2008년)로 차근차근 성장했다. 다만 최근 미ㆍ중 갈등이 격화하며 한국은 '동맹 미국'과 '동반자 중국' 사이 선택의 기로에 수시로 놓이고 있다.
⑦'라오펑유' 만나러 방한한 시진핑 (2014)
한·중 관계는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7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파격적 행보를 보였다. 그때까지 북한에 가본 적 없던 시 주석이 북한에 앞서 한국을 먼저 방문하면서다.
이후 2015년 사드(THAAD)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양국 관계는 "역사상 최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시 주석은 박 전 대통령을 '라오펑유'(老朋友ㆍ오랜 친구)로 부르며 십년지기 관계를 과시했다. 관계 공고화의 정점은 박 전 대통령이 이듬해인 2015년 9월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전승절 70주년 열병식에 미국의 동맹국 지도자 중 유일하게 참석했을 때다. 그가 노란 재킷을 입고 천안문 망루에 올라 시진핑,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나란히 군사 퍼레이드를 지켜보는 모습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장면이다.
그해 12월엔 양국 정상이 "역사적 이정표"로 평가한 한ㆍ중 자유무역협정(FTA)가 발효됐다. 당시 1단계로 상품 분야를 먼저 열었고, 이견이 많았던 서비스ㆍ투자 분야와 관련해선 2단계 협상이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사드 갈등이 격화되면서 시 주석은 2014년 7월 이후 단 한번도 방한하지 않고 있다.
⑧한한령ㆍ3불 논란 불러온 '사드 배치' (2016년)
"항장(항우의 사촌)이 칼춤을 추는 건 유방(중국)을 겨누기 위함이다."
2016년 2월 한국이 북한의 4차 핵실험 직후 사드 배치를 결정하자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사드를 '미국의 칼춤'에 비유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를 향해서도 칼을 겨눴다. 직후 대대적으로 시작된 불매 운동으로 롯데·아모레퍼시픽 등 현지 진출 기업이 집중 포격을 받았다.
중국 정부는 줄곧 '한한령(限韓令ㆍ한류제한령)'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지만 분위기를 읽은 중국 관련 업계는 정부 눈치를 보며 아직도 한국과 경제ㆍ문화 교류를 꺼리고 있다.
사드 배치는 문재인 정부 당시 '3불(不)' 논란으로도 번졌다. '3불'은 사드 추가 배치,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계 편입, 한ㆍ미ㆍ일 군사 동맹 발전이라는 '세 가지 사항을 한국이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사실 3불은 2017년 10월 31일 양국이 발표한 '협의 결과'에 '중국 정부의 입장과 우려'로 등장한 게 전부다. 이를 근거로 한국은 "당시 정부가 밝혔던 입장에 불과하다"고 강조하지만 중국은 "약속 또는 합의와 다름 없다"고 주장한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지난 10일 중국 산둥성 칭다오에서 열린 한ㆍ중 외교장관 회담에서도 왕 위원에게 "3불은 합의나 약속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반면 중국은 외교장관 회담 직후 '3불' 외에 이미 배치된 사드 체계에 대해서도 한국정부가 제한적 운용을 약속했다는 의미의 '1한(限)'을 추가로 주장하면서 갈등이 증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