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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시시각각

법정 스님의 봉은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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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115년 만의 수마가 국토를 휩쓸었다. 국가 재난대응시스템에 조종이 울렸다. 서울 ‘강남 스타일’도 잠겨버렸다. 피해 규모를 따지면 1925년 을축년 대홍수가 최악의 사례로 꼽힌다. 이재민 수십만 명, 사망자 640여 명이 발생했다. 강남(당시는 경기도 광주군)도 초토화됐다.

한국 불교의 대표적 사찰 중 하나인 서울 강남 봉은사 입구 풍경. 불법의 상징인 연꽃이 가득 놓여 있다. [중앙포토]

한국 불교의 대표적 사찰 중 하나인 서울 강남 봉은사 입구 풍경. 불법의 상징인 연꽃이 가득 놓여 있다. [중앙포토]

 한데 대재난도 불심을 꺾진 못했다. 97년 전, 봉은사 주지 청호 스님의 헌신이 빛났다. 스님은 사찰 재산을 털어 목선 두 척을 사서 수몰 위기의 지역민 700여 명을 살려냈다.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의 보리심이다. 스님을 기리는 공덕비가 봉은사에 세워졌다.

서울 강남 밝혀온 유서 깊은 도량
스님들의 노조원 폭행 사건 논란
대화와 소통으로 원만히 풀어야

 봉은사는 ‘무소유’의 법정 스님이 거쳐 간 곳으로도 이름났다. 스님은 1960년대 말부터 수년간 봉은사 다래헌에 머물며 불경 번역에 참여했다. 당시 봉은사의 앞날을 걱정하는 글을 불교신문에 기고한 적이 있다. 강남 개발이 불붙던 1970년에 쓴 ‘침묵은 범죄다’다.
 ‘봉은사가 팔린다’는 부제가 달린 이 칼럼에서 법정은 봉은사를 ‘서산·사명 같은 걸승의 요람이자 불교 중흥의 도량’이라고 썼다. 조계종 일각에서 봉은사 임야와 대지 일부를 팔아 불교회관을 짓자는 주장이 일었는데, 법정은 종단의 졸속 추진을 우려하며 “봉은사같이 유서 깊은 도량을 보존·활용하지 못하면 되겠는가”라고 일갈했다.

 봉은사는 예나 지금이나 강남 불교의 핵심 도량이다. 1970년 당시 봉은사 땅 33만㎡(옛 한전 부지)가 정부에 반강제 매각됐다는 연유로 현재 반환 소송이 진행 중이다. 지난 18일엔 1950년대 공무원의 서류 조작으로 잃어버린 땅에 대한 배상금 417억원 지급 판결도 나왔다. 봉은사의 역사·종교·경제적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 봉은사가 지금 뜨거운 논란에 휩싸여 있다. 지난 14일 봉은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박정규 전 조계종 노조 기획홍보부장이 스님들로부터 폭행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불교의 명예와 내부 위계질서를 문란케 했다는 이유로 올 2월 말 해고된 박씨는 이후 원상복직과 노조탄압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를 조계사·봉은사에서 벌여 왔다. 지난 5월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서 부당 해고를 인정받았으나 현재 조계종 측이 재심을 신청한 상태다.
 사건의 실체는 법정에서 가려질 전망이다. 박씨가 스님 셋을 폭행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조계종 노조도 총무원 호법부에 진상조사와 관련자 징계를 요구하는 고소장을 냈다. 물리력을 행사한 봉은사 스님이 지난 16일 개인 차원의 참회문을 냈지만 종단 측의 공식 입장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봉은사는 조계종 총무원의 직영사찰이다.
 지난 주말 봉은사를 찾았다. 빌딩 숲에 둘러싸인 봉은사는 강남의 허파 같았다. 숨막히는 대도시의 오아시스와 비슷했다. 경내 이곳저곳엔 각종 기도와 법회, 불사(佛事)를 알리는 안내문이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종식을 기원하는 현수막도 보였다. 현실의 고뇌와 함께 호흡하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봉은사의 트레이드 마크는 판전(板殿)이다. 부처님 말씀을 새긴 경판 3500점이 봉안돼 있으며, 특히 추사 김정희가 타계 사흘 전에 쓴 큼지막한 편액이 걸작으로 꼽힌다. 어린애의 자유로움과 대가의 단단함이 어울리는 두 글자가 부처의 넉넉한 미소와 용맹한 수행을 닮았다. 세상의 폭력을 부정하고 만물을 차별 없이 받아들이는 불교의 기본 가르침이다.

 법정 스님의 ‘침묵은 범죄다’를 다시 읽어 본다. ‘승가정신은 폭력이나 독선적인 수단에 의지하지 않는다’ ‘의견이 서로 다를 때는 공정한 판단을 내걸 수 있는 중지에 묻는다’ ‘배타적인 태도를 지양, 공존의 윤리를 찾는 것이다. 그것은 곧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덕이다’고 했다. 52년 전의 죽비가 지금 더 따끔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뭘까. ‘대한민국의 얼굴, 글로벌 타운 강남의 맑은 심장’(봉은사 홈페이지)인 봉은사의 진면목을 보고 싶다. 대화와 소통을 통한 원만한 사건 해결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