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 설계자 박철언 "핵 재배치 카드 꺼내 中과 북핵 담판해야"[한·중 수교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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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개혁ㆍ개방으로 끌어내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山)이 북한과 혈맹인 중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이다."

지난 17일 서울 삼성동 한반도복지통일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박철언 재단 이사장은 1988년 3월 막 취임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 정책보좌관이던 자신에게 직접 내렸던 비공개 지시 내용을 소개했다.

박철언 전 정무장관이 17일 서울 강남구 선릉로 한반도복지통일재단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박철언 전 정무장관이 17일 서울 강남구 선릉로 한반도복지통일재단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북한의 개방을 목표로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자주 외교를 수행할 계기를 만들라”던 노 전 대통령의 지시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이듬해 구소련 해체 등과 맞물려 진행했던 ‘북방정책’의 시작점이 됐다. 이를 주도했던 이가 박 이사장이다.

박 이사장은 3시간 가까운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30년 전에도 중국이 결국 인도ㆍ태평양에 진출하고 미국과 함께 G2가 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패권 경쟁이 이뤄질지 몰랐다”며 “중국이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을 일종의 주종 관계나 갑을 관계로 여기는 잘못된 인식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한ㆍ중 관계가 갈등과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1992년 9월 27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중국에 도착, 양상쿤(양상곤) 당시 중국 국가주석과 함께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중앙포토

1992년 9월 27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중국에 도착, 양상쿤(양상곤) 당시 중국 국가주석과 함께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중앙포토

한ㆍ중 수교의 핵심 목표 중 하나가 북한 비핵화였다. 목표를 달성했다고 평가하는가.
“북한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국가인 중국은 핵ㆍ미사일 문제에 실질적 노력을 하지 않았다.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한 지 29년이 지났고 1차 핵실험을 감행한 지 16년이다. 지금도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무기 선제사용까지 언급하는데도 방치하고만 있다. 이는 미국이 일본ㆍ한국ㆍ대만ㆍ호주ㆍ인도를 연결해 중국을 포위하고, MD(미사일 방어) 체계로 견제하는 데 대해 중국이 북한을 이에 맞설 전략적 자산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1992년 9월 27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중국 공식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내걸린 태극기. 중앙포토

1992년 9월 27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중국 공식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내걸린 태극기. 중앙포토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을 유도할 방안은.
“북핵은 중국이 앞장서지 않으면 해결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확장해 중국을 견제하는 방식에는 무리가 생길 수 있다. 오히려 동북아시아에서의 중국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MD체제를 완화해 활로를 열어주는 전략이 필요하다. 한국 입장에선 ‘북핵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으면 미국의 전술핵을 재배치하거나 자체 핵개발을 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라도 중국과 강하게 담판해야 한다.”
분야별로 조언해 달라.
“외교ㆍ안보에서 한국이 북한의 핵 위협에 있는 현실을 당당하고 끈질기고 일관되게 설명해야 한다. 또 북핵 때문에 한ㆍ미동맹을 기본축으로 할 수밖에 없음을 납득시켜야 한다. 경제에선 핵심 전략물자에 대한 중국 의존도를 줄이고,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공급망을 재구축해야 한다. ‘칩4’와 관련해선 가치동맹의 불가피성을 중국에 설명해야 한다. 특히 사회ㆍ문화적 교류를 통해 양국 국민ㆍ정부 간 무너진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양국은 ‘이사갈 수 없는 이웃’이다. 공동번영해야 한다는 필연적 역사의식을 공유해야 한다.”

박 이사장은 여러차례 “노태우 전 대통령이 대북 문제와 북방정책의 전권을 내게 위임했다”고 말했다. 그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도 “대북 문제도 청와대 밀실에서 몇사람이 추진한다고 뒤에서들 말하는 모양인데, 비밀외교도 할 수 있고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다”며 박 이사장에게 힘을 실어준 노 전 대통령 발언이 소개돼있다.

박철언 한반도복지통일재단 이사장이 지난해 10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빈소 조문을 마친 뒤 나서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박철언 한반도복지통일재단 이사장이 지난해 10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빈소 조문을 마친 뒤 나서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한국 외교가 눈치를 본다는 지적도 있다.
“30년전엔 중국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한국이 먼저 소련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북한과 동시 유엔가입을 했기 때문에 조급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중국이 한국과 수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과 일본이 문제였다. 외교ㆍ정보라인을 통해 대북이나 공산권 접촉 등을 통보했는데, 보안 때문에 속속들이 공유하지 않았다. 헝가리와 수교 때는 발표 48시간 전에 미국에 통보하면서 미국이 상당한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윤석열 정부의 대중외교는 어떻게 평가하나.
“자유·인권·평화·복지 등 보편의 가치를 추구하는 가치외교는 여러 부담과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이 방향으로 무게추를 옮겨가야 한다는 현실은 인정한다. 그렇더라도 한ㆍ중이 현실적으로 경제ㆍ사회ㆍ문화적으로 상호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한국의 불가피한 입장을 중국에 잘 설명해 납득시키고 균형ㆍ조화점을 찾아가는 것이 어려운 과제다. 이 부분이 더 중요해질 거라 생각한다. 사실 30년 전엔 중국이 정치적으로 민주화로 나아가고 인권을 신장시키는 방향으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완전히 빗나갔다. 30년이 지나도록 민주화와 인권보장이 안 된 상황이 지속될 줄은 몰랐다.”
박철언 한반도복지통일재단 이사장이 1991년 7월 당시 중국 최고 지도자인 덩샤오핑에게 보낸 편지의 첫장과 끝장의 모습. 사진 박철언 이사장 제공

박철언 한반도복지통일재단 이사장이 1991년 7월 당시 중국 최고 지도자인 덩샤오핑에게 보낸 편지의 첫장과 끝장의 모습. 사진 박철언 이사장 제공

중국과는 어떻게 신뢰 관계를 구축했나.
“열심히 만나 설명했다. 1991년 7월 중국을 방문했는데 중국 측에서 혁명 1세대와 원로를 설득해야 한다며 편지를 써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한ㆍ중 수교가 북한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북한, 중국 등 모두에게 이롭다’는 내용의 장문의 편지를 썼다.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덩샤오핑(鄧小平),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 리펑(李鵬) 국무원 총리, 완리(萬里) 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장, 장쩌민(江澤民) 총서기 등 5명에게 20페이지가 넘는 편지를 전달했다. 그 편지가 한ㆍ중 수교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박철언 한반도복지통일재단 이사장이 1990년 9월 장바이파 베이징 부시장(왼쪽), 천시퉁 베이징 시장과 함께 촬영한 사진. 사진 박철언 이사장 제공

박철언 한반도복지통일재단 이사장이 1990년 9월 장바이파 베이징 부시장(왼쪽), 천시퉁 베이징 시장과 함께 촬영한 사진. 사진 박철언 이사장 제공

대만과의 단교 결정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중국과 수교 협상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대만에 소홀했다. 대만과 단교가 불가피하더라도 격식을 갖춰 대만이 분격(憤激)하지 않도록 설명했어야 했다. 그런데 한ㆍ중 수교를 사흘 앞둔 92년 8월 21일 사전예고도 없이 주한 중화민국대사관에 ‘24시간 이내 출국’을 통보하고, 대만 소유였던 대사관과 자산을 압류해 중국에 양도했다. 한국은 대만을 배려하지 못했고, 대만은 한국에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며 외교 관계를 정리했다.”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로 대만과의 외교관계가 단절 됐다. 당시 오후4시, 서울 명동소재 대만대사관에서 마지막으로 거행된 하기식에 운집한 화교들이 대만 국기가 내려지는 모습을 울면서 지켜보고 있다. 중앙포토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로 대만과의 외교관계가 단절 됐다. 당시 오후4시, 서울 명동소재 대만대사관에서 마지막으로 거행된 하기식에 운집한 화교들이 대만 국기가 내려지는 모습을 울면서 지켜보고 있다. 중앙포토

대북 정책을 조언한다면.
“안보는 강력하고 완벽해야 하지만, 대북정책은 유연해야 한다. 북한이 한반도의 반쪽을 실효 통치하는 실체임을 인정하고 공존을 전제해야 한다. 정권과 무관하게 어떤 경우에도 인도적 지원은 계속해나가며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야 한다. 또 지속가능한 대북정책 추진을 위해 여야, 비정부기구(NGO), 청년층을 포함한 민관 고위급 자문기구가 필요하다. 국민적으로 합의된 대북정책 기조가 있어야 지속가능한 대북정책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의 '담대한 구상'을 어떻게 평가하나.
“담대한 구상은 협상 초기부터 경제 지원을 적극 강구하는 내용이다. 자존심이 강한 북한은 이런 전략에 호응하기 어렵다. 북한은 핵·미사일을 가졌기 때문에 한국을 우습게 보고 있다. 오히려 실효적 남북관계를 전개하고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선 ‘공포의 균형’이 필요하다. 확장억제 전략만으론 미흡하다. ‘북한이 핵을 가지면 한국도 미국의 전술핵을 재배치하거나 자체 핵 개발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북한이 1992년 1월에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합의하도록 이끌었던 것처럼 서로 폐기하는 방식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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