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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부대 합류 꿈꿨던 청년들…'수원예술구락부' 유공자 될까

중앙일보

입력

 제77주년 광복절인 지난 15일 오후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광장에서 미르메 태권도 시범단이 태권도 독립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뉴스1

제77주년 광복절인 지난 15일 오후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광장에서 미르메 태권도 시범단이 태권도 독립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뉴스1

1941년 9월 14일 경기도 수원읍 공설운동장. 한 청년을 불심검문하던 수원경찰서 사찰원은 청년의 품에서 편지 한 통을 찾아냈다. 조선총독부 육군병지원자훈련소에 입소한 ‘최태종’에게 보내려던 편지였다.

“(지원병에 지원한 동기가) 황국신민 사상 때문이 아니라 조선 민족의 열망을 위한 것이라 믿는다. 조선인이란 정신을 잊지 말고 우리의 맹약을 실행하여 달라.”

청년은 즉시 체포됐다. 그의 이름은 최용범. 수원지역 청년 독립단체 ‘수원예술호연구락부’의 지도자였다. 이후 구락부 회원 8명이 차례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수원시는 지난 10일 국가보훈처에 수원예술호연구락부에 참여한 김길준·강성문·차준석 을 포함한 7명에 대해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다. 수원시 산하 수원박물관이 발굴한 사료들이 바탕이 됐다.

예술 앞세운 독립운동, 수원예술호연구락부

수원예술호연구락부는 1939년 10월 수원에 살던 17~27세 청년들이 만든 문화예술단체였다. 최용범을 비롯해 차준석·김길준·강성문·최태종·맹승재·홍종철·박인종·용헌식 등이 주축이었다. 학교 동문·직장 동료 사이인 이들은 “동지를 모아 예술 연구를 하자”는 뜻에서 이런 ‘수원예술호연구락부’라고 이름지었다고 했지만 수원박물관은 이 구락부를 ‘독립운동 단체’라고 소개했다. “일본의 감시를 피해 동지를 모으려고 예술 연구를 표면적으로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이다. 특별한 규약이나 강령을 문서화하진 않았지만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한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수원예술호연구락부 관계자들. 일제 강점기에 옥고를 치렀지만 전향서를 제출하거나 후손이 없어 홍종철 선생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수원예술호연구락부 관계자들. 일제 강점기에 옥고를 치렀지만 전향서를 제출하거나 후손이 없어 홍종철 선생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수원시 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낸 역사학자 박철하씨가 쓴 논문 『일제하 전시체제기 수원예술호연구락부의 활동과 역사적 성격』에 따르면 이 구락부는 비밀회합 등에서 “중일전쟁이 장기화하면 일본이 전쟁에서 패할 것이고 이 틈을 타 독립운동을 일으키면 조선 독립이 일찍 실현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에 합류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실제로 만주에 가기 위한 여비 마련 방법을 논의했다고 한다. 수원에선 농촌 등으로 들어가 야학회를 열고 한글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박씨의 논문엔 이들이 “만주의 ’김일성 부대’에 환상을 가지고 직접 만주로 가서 그들과 함께 일본과 전쟁을 통해 조선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다”는 말이 나온다.

이들을 뭉치게 한 건 일제의 ‘차별’이었다. 박씨가 인용한 경찰 신문조서에는 이들의 울분이 그대로 남아있다.

“어느 관청이나 회사에서도 일본인은 상석을 차지라고 조선인은 항상 아래쪽에 있었다.”(차준석)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일본인의 급료는 월 45원(1원은 100전)인데 우리는 일급 25전 정도였다. 조선인을 노예 취급했다.”(김길준)

“일본인 감독자가 ‘조선인은 몰래 훔치고 놀기만 한다’고 모욕을 줬다”(맹승재)
“학교에서 조선인 학생이 일본인 상급학생에게 결례했다는 이유로 수차례 구타를 당한 적 있다”(최태종)

하지만 최용범이 체포되면서 ‘독립’에 대한 열망은 더 큰 행동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이들은 1942년 7월 27일 치안유지법 위반, 불경죄, 육군형법 위반 혐의 등으로 징역 단기 1년~장기 7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들 중 그동안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은 사람은 홍종철 선생 한 명뿐이었다.

기록 있지만…독립운동 인정받지 못해

다른 회원들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후손이 없어서’였다. 국가보훈처에 포상을 신청하는 건 원칙적으로 유족이 해야하지만 이 구락부 회원 중엔 홍 선생만 후손이 확인됐다. 그에겐 2009년 애족장이 추서됐다. 이동근 수원박물관 학예사는 “홍종철 선생이 애족장을 받으면서 수원예술호연구락부의 활동이 독립운동으로 인정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후손이 확인되지 않아서 포상 신청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수원예술호연구락부 검거 기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수원예술호연구락부 검거 기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후손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포상을 신청하기도 한다. 수원시의 이번 신청에서 수원예술호연구락부의 지도자였던 최용범과 회원 용헌식·최태종은 포상 신청 대상에서 제외했다. 재판 과정에서 “일본에 충성한다”는 내용 등을 담은 전향서를 낸 게 걸림돌이 됐기 때문이다. 다만 최용범의 전향서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재판 과정에서 홀로 있는 노모를 걱정해 “훌륭한 황국신민으로 갱생할 각오”를 언급하며 선처를 호소하긴 했지만, 전향서를 제출했다는 기록은 없다는 거다. 익명을 요구한 향토사학자는 “전향서 제출 등은 곧 ‘일본에 충성하겠다’는 서약과 같다”며 “고문 등 강압 때문에 제출했다고 해도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공산주의 성향 독립운동, 인정받을까

공산주의 지향이 뚜렷했던 이들에게 포상이 재가될지도 관심이 모이는 지점이다. 지난 12일 국가보훈처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였던 여성 항일독립운동가 김명시(1907~1949) 장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사후 73년 만이었다. 그러나 지난 16일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구분하는 입장을 폈다. 박 처장은 “1945년 광복 전엔 나라를 되찾는 게 독립운동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진 사회주의 계열 운동을 하신 분들도 다 서훈을 했다”면서도 “공산주의나 북한 정권에 협조했다면 받아들일 수 없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사회주의 독립운동가가 서훈된 사례가 있긴 하지만, 해방 이후 북한 정권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거나 월북한 이력이 있으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 힘든 것이 사실”이라며 “공산주의 독립운동가의 유족들 중엔‘빨갱이’라는 시선을 우려해 포상 신청을 주저해 온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항일투쟁기의 김일성을 추종했지만 실제로 그들과 결합하지는 못했던 수원예술호연구락부 인사들에 대한 포상 여부가 관심을 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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