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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안심하고 농사" 외국인 근로자 이탈 없는 지자체 비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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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군은 방울토마토와 멜론 주산지다. 1년 내내 재배와 출하가 이뤄지기 때문에 늘 일손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국인들은 높은 임금, 외국인 근로자는 잦은 이탈로 농가의 근심이 끊이지 않는다. 일하러 오겠다던 외국인 근로자들이 잠적해 출하에 차질을 빚기도 했다. 부여군은 만성적인 인력 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올해 처음으로 ‘외국인 계절근로자 제도’를 도입했다. 지난 5월 말부터 6월 30일까지 5차례에 걸쳐 순차적으로 120명이 입국했다. 모두 필리핀 세부 코르도바시(市) 주민으로 농가 26곳과 세도농협에 배치됐다.

지난 2일 충남 부여군 장암면의 한 농장에서 필리핀에서 온 외국인 계절근로자들이 정리작업을 하고 있다. 이 농장에 배치된 4명의 근로자는 5개월간 일한 뒤 필리핀으로 돌아간다. 신진호 기자

지난 2일 충남 부여군 장암면의 한 농장에서 필리핀에서 온 외국인 계절근로자들이 정리작업을 하고 있다. 이 농장에 배치된 4명의 근로자는 5개월간 일한 뒤 필리핀으로 돌아간다. 신진호 기자

부여군은 외국인 계절근로자를 초청하면서 이탈을 막기위해 안간힘을 썼다. 입국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도주하는 계절근로자가 많기 때문이다. “(돈을) 더 줄 테니 여기로 오라”는 브로커 제안에 도주를 감행하면 근로자는 불법체류자 신분이 된다. 부여군은 코르도바시에 이탈 방지 계획을 마련해달라고 요청했다. 계절근로자의 입국 목적이 ‘돈’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코르도바시는 근로자 1인당 150달러의 보증금을 받아놓고 무단 출국 때는 필리핀 출입국관리소에 즉시 통보하도록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부여군, 필리핀 코르도바시와 협약…120명 입국

이런 대책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코르도바시는 계절근로자가 무단으로 이탈하면 아예 입국하지 못하도록 규제를 강화했다. 필리핀 현지에 남아 있는 가족이나 친척은 다른 나라로 출국하지 못하도록 ‘연대책임’을 묻도록 했다. 비자발급도 중단된다. 도주하면 친인척 모두가 피해를 보는 이중 삼중의 대책을 마련한 것이다. 이런 대책 때문에 부여군에 도착한 필리핀 계절근로자 중 이탈자는 단 1명에 불과하다.

지난 2일 충남 부여군 장암면의 한 농장에서 필리핀 계절근로자인 마리아와 에이프릴, 메이펄, 브룩쉴즈가 환하게 웃고 있다.(오른쪽부터) 이들은 이곳에서 5개월간 일한 뒤 필리핀으로 돌아간다. 신진호 기자

지난 2일 충남 부여군 장암면의 한 농장에서 필리핀 계절근로자인 마리아와 에이프릴, 메이펄, 브룩쉴즈가 환하게 웃고 있다.(오른쪽부터) 이들은 이곳에서 5개월간 일한 뒤 필리핀으로 돌아간다. 신진호 기자

부여군 차명찬 농업인력지원팀장은 “외국인 계절근로자 이탈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다른 자치단체와 비교하면 눈여겨볼 만한 대책”이라며 “농가들 사이에서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안심하고 농사를 짓게 됐다며 만족해한다”고 말했다.

무단 이탈 때 현지가족 연대책임 등 대책 마련

부여군은 농장에 배치된 계절근로자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도록 현장 관리·감독도 강화했다. 농장주와 근로자 간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발생할 문제를 사전에 해결하고 혹시 모를 인권침해도 예방하기 위해서다. 부여군이 직원 2명은 매일 농장을 돌며 근로자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해결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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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계절근로자들은 농장이나 비닐하우스에서는 거주하지 못한다. 안전을 위해 농장주 집이나 바로 옆에 거주지를 마련해야만 근로자를 배치할 수 있도록 까다로운 조건도 내걸었기 때문이다. 계절근로자 거주지엔 냉난방과 취사시설도 마련됐다. 근로시간도 월 228시간을 초과하지 못하고 매달 이틀은 의무적으로 쉬어야 한다.

충남 부여군 장암면에서 토마토농장을 운영하는 최종길·김선주씨 부부가 지난 2일 필리핀 계절근로자들과 일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신진호 기자

충남 부여군 장암면에서 토마토농장을 운영하는 최종길·김선주씨 부부가 지난 2일 필리핀 계절근로자들과 일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신진호 기자

부여군 장암면 배불뚝이농원에도 계절근로자 4명이 배치됐다. 지난 2일 방문한 농장에선 근로자들이 수확을 마친 방울토마토 줄기를 정리했다. 이들은 30대 초~중반의 여성으로 10월까지 5개월간 머물며 일하게 된다. 농장을 운영하는 최종길(54)·김선주(55)씨 부부는 “손이 빠르고 성실해 조만간 우리나라 근로자 수준까지 능률이 오를 것 같다”고 설명했다.

농민들 "성실하고 일도 빨리 배운다" 만족 

최종길 대표는 “여기저기 연락해도 사람 하나를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우리가 원하는 근로자를 4명이나 배치해줘 고맙다”며 “(군청에) 30대 초반의 근로자를 요청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성실하고 일도 빨리 배워서 만족한다”고 말했다.

충남 부여군이 필리핀에서 입국한 외국인 계절근로자들을 교육한 뒤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사진 부여군]

충남 부여군이 필리핀에서 입국한 외국인 계절근로자들을 교육한 뒤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사진 부여군]

부여 지역 농민들은 10월 말로 예정된 계절근로자들의 귀국 시점이 가장 큰 걱정이다. 가을부터 방울토마토를 본격적으로 수확하는데 근로자가 돌아가면 일손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종길 대표는 “(계절근로자가) 돌아가면 아무리 빨라도 한 달 뒤에야 다시 입국할 수 있다는 데 그사이 공백을 어찌 메울지가 고민”이라고 걱정했다.

홍천군, 결혼이주여성 직원 채용…민원 처리

강원 홍천군은 2017년부터 필리핀 산후안시에서 계절근로자를 받고 있다. 2017년 81명을 시작으로 2018년 312명, 2019년 354명, 2022년 534명 등 모두 1281명이 입국했다. 매년 입국 인원이 늘고 있지만, 현재까지 이탈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외국인 계절근로자 이탈이 ‘ZERO’인 건 통역과 민원 처리를 담당해 온 아그니스(47·여)의 역할이 크다. 아그니스는 홍천군청 농촌인력지원TF팀에서 일한다.

강원도 홍천으로 시집을 온 필리핀 출신 결혼 이주여성 아그니스(오른쪽)가 계절근로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환하게 웃고 있다. 박진호 기자

강원도 홍천으로 시집을 온 필리핀 출신 결혼 이주여성 아그니스(오른쪽)가 계절근로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환하게 웃고 있다. 박진호 기자

2002년 결혼이주여성으로 한국에 들어온 아그니스는 계절근로자가 입국하면 곧바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친구를 맺은 뒤 실시간으로 민원을 접수한다. 지난 5월 16일에는 복통과 심한 구토증상이 나타난 조엘그렌(47)의 연락을 받고 춘천의 대학병원으로 그를 이송했다. 간농양 판정을 받은 조엘그렌은 9일간의 치료를 마치고 무사히 일터로 복귀했다. 아그니스는 “목소리 큰 농장주가 무섭다”는 찬디(37)의 소식을 듣고 농장을 방문, 오해를 풀었다. 임금 체불로 힘들어하는 근로자를 대신해 돈을 받아주기도 했다.

근로자-농장주 갈등 때 결혼이주여성이 해결 

지난달 29일 아그니스와 함께 찬디가 일하는 홍천군 내면 맹재혁(51)씨의 밭을 찾았다. 밭에서 아그니스를 맞이한 찬디는 “이제 사장님이 무섭지 않다”며 환하게 웃었다. 맹씨는 “무더위에 열심히 일해줘 고맙다”며 “이번 달 월급 때 보너스를 지급하겠다”고 화답했다.

필리핀 계절근로자들이 강원도 홍천군의 농장에서 애호박을 수확하고 있다. 박진호 기자

필리핀 계절근로자들이 강원도 홍천군의 농장에서 애호박을 수확하고 있다. 박진호 기자

아그니스는 “늦은 밤이나 주말에도 SNS 메신저로 도움을 요청하는 근로자가 많은데 막상 현장에 가면 대부분이 의사소통이 안 돼서 생기는 사소한 문제”라고 말했다.

홍천군-산후안시 2009년 협력체결…네번째 입국

필리핀에서 홍천으로 들어온 계절근로자들이 이탈하지 않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홍천군과 산후안시는 2009년 우호친선 교류협력을 맺은 뒤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하며 신뢰를 쌓아왔다. 계절근로자 파견 때 산후안시는 모집공고를 낸 뒤 공무원 8~10명으로 구성된 선발위원회가 농업 관련 인터뷰를 진행한다. 이탈을 차단하기 위해 배우자·부모 등이 보는 데서 귀국 선서와 가족 보증 절차도 진행한다.

강원도 홍천으로 시집을 온 필리핀 출신 결혼 이주여성 아그니스(오른쪽)가 계절근로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환하게 웃고 있다. 박진호 기자

강원도 홍천으로 시집을 온 필리핀 출신 결혼 이주여성 아그니스(오른쪽)가 계절근로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환하게 웃고 있다. 박진호 기자

홍천군이 직접 근로자를 초청하기 때문에 별도의 수수료도 들지 않는다. 비용은 항공권과 건강검진·비자발급·교통비·귀국보증금 등을 합쳐 123만원 정도다. 중간 수수료(브로커비)가 들어가지 않다 보니 5개월간 일한 뒤 1인당 900만원 정도를 벌어갈 수 있다.

홍천군 "브로커 개입 차단, 신뢰관계가 핵심" 

홍천군 배찬희 농촌인력지원 T/F팀장은 “외국인 계절근로자 이탈을 막으려면 송출 비용을 최소화해 근로자가 많은 돈을 벌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라며 “브로커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선 오랜 기간 신뢰관계가 형성된 지자체에서 인력을 데려오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민간(사설)업체가 인력을 선발·송출하는 역할을 대행하는 구조부터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공신력이 높은 정부나 자치단체가 직접 나서야 한다는 얘기다.

지난해 12월 27일 박정현 부여군수(왼쪽 셋째)가 필리핀 세부주 코르도바시와 외국인 계절근로자에 대한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있다. [사진 부여군]

지난해 12월 27일 박정현 부여군수(왼쪽 셋째)가 필리핀 세부주 코르도바시와 외국인 계절근로자에 대한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있다. [사진 부여군]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선발은 물론 입국과 출국까지 공공기관에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며 “자치단체가 관련 업무를 하기에 어려우면 산업인력공단 등에서 담당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전문가 "계절근로자 선발부터 공공기관이 책임"

계절농업노동자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 캐나다는 민간 인력중개업체가 선발한 외국인 근로자는 입국 자체가 불가능하다. 송출국 정부가 선발한 근로자만 입국할 수 있다. 노동자가 적격인지도 해당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 캐나다의 농장주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8개월 동안 외국인을 고용할 수 있다. 호주는 태평양 도서 국가들과 협정을 맺고 계절근로자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근로자 모집 및 채용은 공인업체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계절근로자는 최대 9개월까지 근무가 가능하고, 고용주는 이듬해 이들을 재고용할 수 있다.

강원도 홍천의 한 들판에서 필리핀 출신 계절근로자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박진호 기자

강원도 홍천의 한 들판에서 필리핀 출신 계절근로자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박진호 기자

이와 관련, 강원도는 최근 외국인 계절근로자 체류 기간을 5개월(E-8)에서 8개월로 연장하는 방안과 성실 근로자 재입국 추천 때 출국 없이 기간을 연장해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법무부에 보냈다. 부여군도 농장주나 자치단체의 초청장이 있는 경우 귀국 후 1개월 이내에 다시 입국할 수 있도록 관련 부처에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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